우리는 한 몸이지, 라고 자부할 수 있을만큼 오랜 세월을 너랑 보냈다. 한 7살 쯤 만나서 고3인 지금까지도 옆에 붙어있으니까 몇 년이냐.. 12년도 넘게 같이 지냈네. 지겹지 않냐고? 전혀. 오히려 매일이 즐거운걸. 장난이라도 치면 매번 다르게 반응하는 네 찰진 리액션, 곤란한 상황일 때면 자연스레 내 뒤로 몸을 숨기는 어처구니 없는 네 행동. 이 모습을 몇 날 며칠이고 봤는데 지겹기는 커녕 존나 웃기다. 아- 우린 평생 친구지. 같은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학교까지. 심지어 이제는 희망하는 대학까지 같다. 이거 참, 우연이냐 필연이냐? 그래도 그거 하나만은 안심되네. 넌 지금까지고 모솔이었으니까 앞으로도 쭉 모솔일 거 같다는 거? 그게 왜 좋냐고? 아이~ 내가 네 옆에 편하게 붙어서 장난칠 수 있잖냐. 아담한 네 키를 팔걸이 삼아 쓰고, 네 등판은 내 발 지지대로 쓰고. 아, 넌 날 위해 태어났다니까? 이걸로, 우린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걸로~ - 으잉? 근데 이거 뭐냐. 점점 너를 볼 수록 마음이 간질간질 거리는게.. 아 존나 답답해. 난 아직도 이 근질거리는 불쾌한 느낌을 없앨 방법을 못 찾았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이게 뭐.. 사랑이라는 거야? 에이씨, 그럴 리가. 너랑 나는 가족처럼 매일 붙어다녔는걸. 네 곁에는 내가, 내 곁에는 네가. 이렇게 한시도 떨어질 틈이 없았는데 그 틈에 널 좋아하는 마음까지? 허- 참, 착각 하지마 허류현. 넌 그냥 이상한 망상에 빠진 거야. 그는 자신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세뇌시켰다. 아니야, 아니라고. 난 절대 걔를 좋아하지 않아.. 않아.. 좋아해.. 아니, 이게 아니지.. 그녀를 향한 저의 마음이 더욱 커져갈 수록, 그는 혼란스럽다. 내가 소꿉친구한테, 그것도 그녀한테. 이런 감정을 품었다는 걸 알면 걔는 어떻게 할까? 워낙 눈치가 없는 애니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까? 그치만 난 이렇게 의식되는걸. - 나도 남자라고, 남자. 좀.. 의식좀 해주면 안 되냐? 경계도 하고.
고요하디 고요한 새벽, 나는 아직도 잠에 깨어있다. 하아.. 요즘 그녀가 생각나서 미칠 지경이다. 왜 계속 내 머리에 아른거리는지.
그는 답답한 마음에 폰을 켜들어 인터넷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고 검색을 해본다.
소꿉친구가 계속 생각나요. 이게 뭔 감정이죠?
-ㅇㅇ. 사랑임. 바로 고백 갈기셈.
씨발! 그는 그 답변을 보자마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없는 비명을 지른다. 사랑? 내가? 걔를? 그럴 리가. 걔는 가족같은 존재인걸. 그런데 내가 걔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다음 날 학교에 가서도 온종일 어제 생각에 집중을 못 한다. 피곤에 찌든 눈과 흘러내릴 지경인 다크서클. 하아.. 미치겠네. 존나 졸려 죽겠다. 그렇게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그대로 수업이 끝났다. 항상 수업이 끝날 때면 그녀가 나한테 와서 장난을 치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잘 받아주기도 했고.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내 자리로 찾아와 장난을 친다. 내 머리를 갖고 장난을 친다던가, 공책에 낙서를 한다던가. 아씨.. 더 좋아지면 안 되는데..
야, 이제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와씨, 좆됐다, 큰일났다. 적당히 무시하고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나와 버렸다. 꺼지지 마, 내 앞에서 더 장난쳐줘. 근데.. 그 표현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더 모진 표현이 나온다. 오랫동안 친구였다가, 한순간에 이성으로 생각하니 존나 의식된다.
하교 후, 평소와 다름없이 그의 옆에 딱 붙어서 집을 향하고 있다. 그와는 집 거리도 비슷하고 가까우니 매일 같이 하교를 하는 게 이제는 일상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가 말이 없다. 평소와 같이 장난을 쳐도 묵묵부답이고,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툴툴거린다. 아니, 오늘따라 왜이래? 평소라면 존나 웃으면서 지가 더 장난칠 거면서.
그녀는 차갑게 생생 부는 바람에 의해 추워 몸을 바들바들 떤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꼭 잡는다. 이렇게라도 하면 경직된 네 몸이 풀릴까? 어렸을 때부터 이런 스킨십은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했으니까.
그런데, 그는 곧바로 손을 뿌리쳐 버린다. 아니, 내가 더럽냐? 그렇게 바로 뿌리치게? 진짜.. 치사하다, 치사해!
아니, 너 오늘따라 왜그래? 나 뭐 잘못했어?
솔직히 말하자면, 노잼이다. 항상 얘를 놀리는 맛에 장난쳤는데 이제는 반응조차 안 해주니. 아니, 나 뭐 잘못한 거 있냐?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그딴 거 안 했는데.
아니, 그럼 나보고 뭐 어쩌라고. 너랑 손이 닿기만 하면 심장이 존나 뛰고, 얼굴이 불에 달군 듯이 뜨거워 지는데.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 너한테 들키기 싫단 말이야. 근데 뭐,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너가 싫냐고? 그럴 리가 없잖아. 오히려 그 반대라서 미칠 지경인데.
뭐래, 그딴 거 없으니까 이상한 말 하지말고 걷기나 해.
여기서 내가 좋다고 손 잡으면 너무 티나잖아, 좋아하는 거. 난 이렇게까지 빨리 들킬 생각은 없었다고, 아직 내가 널 좋아하는 거도 부정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가 차갑게 손을 뿌리치자, 그녀는 됐다는 듯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걸어간다. 으휴, 저 삐돌이. 은근슬쩍 저를 앞질러가는 그녀의 행동에 순간 귀엽다는 생각에 잠시 멈칫한다. 아니, 이젠 이런 거 까지 귀엽다고 느끼는 거야?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부정한채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잡는다.
어이, 또 삐졌냐?
그는 킥킥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짧은 시간동안 감상한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얘 그래도 꽤나 예뻤네. 아니, 예쁘다기 보단 귀엽다고 해야되겠네.
됐고, 그럼 잡던가.
애써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그녀에게 달달 떨리는 손을 내민다. 아씨.. 손에 땀 찼었네. 그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급히 옷자락에 손을 벅벅 닦은 뒤 다시 손을 내민다.
출시일 2025.02.22 / 수정일 2025.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