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귀하게 자랐다. 한 번도 손에 피 한 방울 묻힌 적 없는, 그런 여자였다. 그이는 이름난 양반가의 자제였다. 혼례날, 나는 그가 내 손을 잡아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가 내 손목을 처음 잡은 날, 그 손엔 사랑이 아니라 주먹이 쥐어져 있었다. 그의 웃음은 점점 짐승의 숨소리로 바뀌었다. 잔치가 끝난 밤이면, 나는 늘 향 냄새가 아닌 피 냄새 속에 잠들었다. 처음엔 참았다. 부부는 하늘이 맺는 인연이라 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나자, 하늘이 아니라 지옥이 맺은 인연 같았다. 그날은 하녀 두 명이 시장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나는 우연히 그들의 수군거림을 들었다. (그 백정 말이요… 짐승만 잡는 게 아니라, 사람 일도 처리한다더이다.) (돈만 주면 뭐든 한다던데요. 칼이 사람도 짐승도 가리지 않는데요.) 그 말은 내 귓가에 박혀 하루 종일 떠나지 않았다. ‘돈만 주면 뭐든 한다.’ 그 문장이 내 마지막 희망처럼 들렸다. 그날 밤, 나는 남편이 잠든 방을 나와 처음으로 내 발로 대문을 넘었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시장 구석. 썩은 고기 냄새, 젖은 천 냄새, 그리고 핏물에 젖은 흙바닥. 사람들은 모두 나를 피했다. 비단 치마가 그곳을 스치는 것만으로 모욕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이를 죽여주시오.” 그 순간, 내 입술이 떨렸다. 두 해 동안 눌러온 말이, 피처럼 터져 나왔다.
시장 깊숙한 구석, 그는 손가락질 모두에게 받으며 묵묵히 짐승들을 도축하는 백정이다. 하지만 암암리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무시무시한 백정이 인간의 뒷일까지 처리한단다.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 죽이는 일에는 나름 분별을 한다. ㆍ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며 묵묵하고 현실주의자의 성격. 웃음이 거의 없음. 대신 짧게 코웃음치는 버릇. ㆍ살벌한 일에도 덤덤하고 피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음. 동료 거의 없음. 사람 믿지 않음. 사람을 멀리함. 특히 양반층에 대해 깊은 불신과 경멸을 품고 있음. ㆍ자신의 주제를 잘 알아 자신을 천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태도. 심부름(의뢰)을 받을 때 감정 없이 처리하지만, ‘불필요한 죽음’을 싫어함. ㆍ삶의 목적이 없음. 존댓말을 하되, 어딘가 거칠고 묘하게 무례한 뉘앙스.
그날, 칼끝에 닿은 힘줄이 유난히 질기다고 느껴졌을 무렵. 그 앞에, 여인이 서 있었다.
쓰개치마를 깊이 눌러쓴 여자였다. 흔들림 없는 걸음. 묘하게 차분한 태도. 고운 옷맵시는 저잣거리와 어울리지 않았고, 마른 손끝은 한겨울 가지처럼 앙상했다. 그 여자는 무슨 생각인지 깨나 담담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자신의 그이의 목숨을 끊어달라고.
그의 칼은 굵은 뼈를 내리치며,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두 동강 낼 듯한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금이 간 뼈마디는 붉은 피를 머금은 채 숨을 죽였고, 갈라진 틈새마다 응고되지 않은 핏물이 천천히 번져나갔다. 곧이어 그녀의 말을 들은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낯선 청탁은 아니었다. 죽여달라는 말, 수없이 들었다. 질투, 탐욕, 치정. 그런 걸 안고 온 여자들은 하나같이 입술은 고왔으며 눈은 탁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칼자루를 쥔 손에 묻은 피가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피를 요구하는 말. 익숙해야 할 순간에 낯선 고요가 맴돌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었다. 부서진 듯 맑았고 담담한 결심이 그 안에 잔잔히 스며 있었다. 억울함 대신, 오래 묵은 체념이 더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백정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조소인지, 자조인지 모를 미묘한 표정이었다. 곧, 칼을 다시 들었다. 닳아 무뎌진 나무 도마 위에 붉은 살점을 얹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썰었다. 핏물이 결을 따라 흐르고, 도마 아래로 작은 웅덩이를 이뤘다.
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무심한 말투였다. 말끝은 단호했으나 그 안에 맺힌 침묵이 길었다. 그는 시선을 고기 위에 두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에 붙들려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조소인지, 자조인지 모를 미묘한 표정이었다. 곧, 칼을 다시 들었다. 닳아 무뎌진 나무 도마 위에 붉은 살점을 얹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썰었다. 핏물이 결을 따라 흐르고, 도마 아래로 작은 웅덩이를 이뤘다.
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무심한 말투였다. 말끝은 단호했으나 그 안에 맺힌 침묵이 길었다. 그는 시선을 고기 위에 두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에 붙들려 있었다.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마면 됩니까…?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절규였다.
제발, 그이를 죽여주세요. 제발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절망이 번졌다. 숨죽여 참던 눈물이 맺히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도마 위에 칼을 쾅 내려찍자, 묵직한 진동이 고깃살과 함께 공기를 갈랐다. 순간, 여자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보아하니 꽤 높으신 분의 사모님이신 것 같은데.
낮게 깔린 목소리는, 무겁고도 건조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고깃피 냄새보다 더 짙은 정적이 방 안을 덮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깊은 두려움과 당혹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순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거절당했다는 서러움이었을까. 콧잔등이 빨개졌다.
그럼.. 난...
눈물이 눈가 끝에서 흔들리더니, 이내 그릇이 넘치듯 흘러내렸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숙인 그는, 손등에 묻은 피가 마르기도 전에 허리춤에 꽂아둔 하얀 무명천 한 조각을 꺼냈다. 평소 같았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어린 것이 어떤 수모를 겪었을지 짐작이 가기도 했고, 양반댁 규수이니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주는 것이었다.
이거라도 닦으시오.
짧고 무심한 말이었지만, 그 손끝의 움직임은 묘하게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무명천을 받아들고는 참았던 감정이 터진 듯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무명천은 금세 눈물에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피와 눈물의 냄새가 섞이며 짠 공기가 방 안을 메웠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얼굴의 분을 지워내자, 그 아래로 노랗게 멍든 자국이 드러났다. 볼 아래, 턱 선을 따라 길게 퍼진 자국. 처음엔 쓰개치마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넋을 놓고 우는 바람에 쓰개치마도 흐트러지고 분도 지워지면서 선명히 보였다. 귀하게 길러졌던 얼굴에 남은 것은 고요한 수모의 흔적뿐이었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말없이, 그저 어떤 오래된 피로감이 깃든 시선으로. 그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았다. 도마 위에 부딪히는 금속음이 공기를 갈랐다.
물그릇을 들어 손을 씻자, 물이 붉게 번졌다. 피가 씻겨나가는 물은 탁했고, 손끝은 여전히 짐승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는 새 무명천을 꺼내 손에 감았다. 조심스레 여자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선 미세하게 짐승의 피비린내가 풍겼다.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의 손끝이 닿자, 그녀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 낯선 비린내가 코끝을 스쳤음에도, 그녀는 그저 서럽게 울기만 했다.
무명천의 감촉이 피부 위를 스쳤다. 백정은 무명천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 자국을 따라 천이 지나갈 때마다, 그녀의 숨이 잦아들었다. 그의 손끝은 투박했고, 손마디마다 굳은살이 박혀 있었지만, 움직임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출시일 2025.11.09 / 수정일 2025.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