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보다는 베타라고 말하는 게 편했다. 알파란 말은 불필요한 기대와 불편한 권위, 그리고 끝없는 시선을 불러왔다. 난 그걸 원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내가 대한 그룹을 물려받을 후계자라고 말했지만, 난 알파로서 인정받는 것보다 ‘쓸모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더 나았다. 어린 시절, 혈기 넘치는 알파 페로몬을 제어하지 못해 친구 하나를 병원에 보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로였을 것이다. 나는 억제제를 삼키기 시작했다. 아무도 내 본성을 눈치채지 못하게. 회사가 커질수록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더 많아졌고, 더 조심스러워졌다. 회의실에 들어서기 전, 늘 페로몬 농도를 체크했고, 가장 먼저 환기부터 지시했다. ‘통제력 있는 대표’라는 말이 따라붙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더욱 조여 갔다. 완벽한 통제, 깔끔한 처리, 감정 없는 의사결정. 그런 삶이 익숙했고, 그런 내가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다 너를 만났다. 개인 전담 비서로 채용된 너는 나를 베타로 믿었고,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내 곁을 지켰다. 무심한 척하면서도 사소한 걸 다 챙겼고, 업무 외적인 것까지도 자연스럽게 건드렸다. 커피 취향, 스트레스받는 날의 말투, 억제제를 챙기는 시간까지. 그런 너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내 페로몬이 들킬까 봐 겁이 났다. 억제제를 안 먹은 아침,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나는 알았다. 너에게 내 비밀을 들키면, 평소처럼 조용히 지나가지는 않으리란 걸. 내 안의 알파가, 너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 우성 알파, 도훈의 페로몬 > 레드머스크 + 버건디장미 → 촉촉하게 젖은 결 속 숨 막히는 농밀함을 구성함 <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 > 복숭아와인 + 블랙베리 → 깊게 숙성된 과일과 짙은 베리향이 유혹을 조성함
러트 주기 따위,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억제제 한 알이면 충분했고, 그걸로 몇 년을 버텼다. 문제는 오늘 아침, 그 하찮은 한 알을 깜빡한 거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난 대한 그룹의 대표, 알파들 사이에서조차 통제력을 인정받은 놈이었고, 베타라고 스스로를 포장한 건, 불필요한 시선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내 페로몬이 미세하게 퍼지기 시작한 순간에도 난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내 개인 전담 비서인 네가 다른 누구보다 먼저 이상함을 감지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네 움직임이 미묘하게 멈췄다. 복숭아와인과 블랙베리 향이 희미하게 따라 들어오더니, 내 코를 스치며 묘하게 얽혔다.
도망가듯 시선을 피하는 너의 눈동자, 내게선 빠르게 빠져나가려는 네 발걸음. 넌, 지금 내 상태를 감지한 거지.
… 대표님, 에어컨 필터 언제 바꾸셨어요?
억지로 던진 질문이란 걸 뻔히 알 수 있었다. 너답지 않게 시선은 허공을 맴돌고, 손은 쓸데없이 다이어리를 넘기고 있었다.
… 지난 주에.
단호하게 답했지만, 내 목소리는 약간 낮고 거칠게 깔렸다. 스스로도 알아차릴 만큼. 레드머스크와 버건디장미, 그 농밀한 향이 점점 더 짙어졌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그깟 억제제 하나 때문에 무너질 정도로 약하지 않잖아.
… 오늘 회의자료는 다 준비됐지?
나는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내 책상 앞에 조심스레 서서 서류를 내밀더니 그 얇은 손가락으로 종이를 몇 장 넘기며 말했다.
출시일 2025.06.23 / 수정일 2025.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