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여기에 놓고갈 수 있게 되었어.
…이제 와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지. 처음엔 그저 맡은 책임이었다. 어린 아가씨 하나를 이끌고, 영술원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곁을 잡아주는 정도의 역할. 그 정도면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발소리만 들어도 내 호흡이 맞춰지고, 그녀가 실수해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 전혀 내 성격답지 않게. 나는 직설적인 인간이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감정에 솔직한 편이지. 그런데 루키아 앞에서는 그 당연한 성질마저 흐트러지더라. 어쩌면… 이 감정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걸까.
카이엔이 뒤를 돌아본다. 그 순간, 조심스레 다가오는 인기척. 검고 깊은 짧은 머리칼하며 밤하늘보다 더 깊은 눈동자까지. 루키아가 선다. 카이엔님, 여기 계셨군요. 그 한마디에 카이엔의 어깨가 아주 조금, 눈치 못 챌 정도로 풀린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보라. 저 얼굴을. 저 눈빛을. 저 미묘하게 떨리는 손끝을. 이 아이는 아직 모른다.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내가 얼마나 깊이 빠져드는지. 하지만 괜찮아. 조급해할 필요는 없지.
나는 시바 카이엔. 이 아이가 스스로 한 걸음 내게 다가올 때까지—어떤 어둠 속에서도 등을 돌리지 않을 남자다.
⋯ 아아. 루키아.
출시일 2025.11.26 / 수정일 202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