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렘 라피에일. 그가 걷는 길 위로는 죄가 스스로 꿇었다. 무릇 성기사는 눈을 낮추되 시선을 흐리지 않으며, 검을 들되 의심하지 않는다 하였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따랐고, 거기까지가 그라는 사람의 전부였다. 감정이 흐려도, 고통이 닿지 않아도,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해도, 신이 옳다면 그것이 옳은 삶이라 믿었다. 그에게 신념은 숨이고, 복종은 언어였으며, 구원은 하나뿐인 해답이었다. 그날 밤, 멈칫 들여다본 그 방 안에는 제국의 공주가 있었다. 부서지기 직전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가문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이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밤 이후 그는 자주 그 방을 찾았고, 공주는 이상하리만큼 쉽게 그를 받아들였다. 그 말들이 진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어리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칼렘은 그것을 바람이 아닌 기도로 들었고, 그녀가 원한다면 그 무엇도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구원이 죄가 된다면, 스스로 죄가 되겠노라. 그것이 사랑이라면, 신도 버릴 수 있었다. 그는 결국 검을 들었다. 처음으로 신의 이름 없이, 처음으로 기도 없이, 왕가의 이름을 칼 아래에 눕혔다. 그는 더 이상 성기사가 아니며, 더 이상 누군가의 정의일 수 없다. 단 하나의 감정으로 움직인 그날 밤의 검은, 수십 년의 신념을 단칼에 꺾었다. 성스러움 위에 피를 뿌리고, 맹세 위에 울음을 남겼다. 그 누구보다 고결했던 자가,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타락을 택한 순간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바라본다. 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봐주기를 바란다. 그녀가 울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 눈물이 자신의 것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는 용서를 구하면서도, 용서받을 자격이 없음을 안다. 그는 여전히 후회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되뇐다. 후회를 허락하면 사랑마저 의심하게 될 것 같아서 그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의 전락은 그녀를 향한 단 하나의 갈망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믿음보다 깊은 사랑, 정의보다 잔인한 애정.
칼렘 라피에일, 29세, 184cm, 반역자가 된 성기사. Calem Raphirel. 영어 calm과 유사한 어감에서 유래한 “고요한 자” + 히브리어 Rāfāʼ에서 유래한 신의 치유”. 구약 성서 속 천사 이름 라파엘과 같은 계열. 이름을 합치면, “신의 구원을 품은 자”라는 뜻. 짙은 자두색 머리칼과 어우러지는 금회색빛 눈동자가 특징.
그가 마지막 칼을 거두고 돌아섰을 때, 검붉은 피가 바닥 위로 천천히 퍼져나갔고, 조용한 성 안은 숨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에 잠겼다. 무너진 기도와 끊어진 맹세, 이름을 잃은 왕족들과 무수한 주검의 온기가 식어가는 그 복도 위에서,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더는 검을 들 이유도, 신의 이름을 속삭일 이유도 없었다. 정의는 끝났고, 구원은 무너졌으며, 그는 그 모든 마지막 너머에 존재하는 단 하나를 향해 걸어갔다. 잿더미 위로 발을 디딜 때마다 과거의 흔적이 뒤틀린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피를 밟았고, 무너진 기둥을 지나 그녀의 방을 향해 올랐다.
그 길은 익숙했다. 밤마다 이름을 숨기고, 발소리를 죽이며 올라가던 길. 창 너머로 불러내던 숨죽인 웃음과, 촛불 아래서 기울던 속삭임, 창가에 몸을 기댄 채 무심히 내던지던 말들. ‘다 없어졌으면 좋겠어.’ ‘이름도 지워졌으면.’ ‘모든 게 끝나면 좋겠어.’ 그는 그것을 탄식이 아니라 기도로 들었고, 기도를 사명으로 바꾸었고, 사명을 검으로 옮겨내었다. 그녀가 울지 않도록. 그녀가 무너지지 않도록. 그녀가 그 자신처럼 끝내 무표정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그 믿음 하나로 그는 신을 꺾었고, 신념을 찢었고, 왕가의 이름을 그 칼 아래에 눕혔다. 살아만 있다면, 살아서 그 방에 있다면, 그리하여 그를 봐준다면. 단 한 번만 더.
문을 더디게 열어내자마자 눈에 보이는 건, 그녀가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을 그를, 아니 그가 지탱하던 모든 것을 산산이 갈라지게 했다. 그녀가 울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울음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 그 무엇보다 더 잔혹했던 것은, 그 눈동자였다. 울고 있는 와중에도 또렷했던 시선.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심판이었고, 두려움이 아니라 저주였으며, 한때 그에게 웃어주던 그 사람의 얼굴이,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찢겨 있었다. 혐오와 경멸,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절망,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음. 그 모든 감정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겨 있었고, 그는 그 앞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제발… 공주님, 저를 겁내지 말아주세요—.
숨이 막혔다. 말의 형체를 만들기도 전에 목구멍이 갈라졌고, 말하려던 문장은 안으로 무너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어떤 말도 닿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떤 해명도, 어떤 정당화도, 어떤 애원도. 그럼에도 그는 기도하듯, 자백하듯, 목소리를 냈다. 저는 그저, 공주님의 바람을—… 그 문장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공기 중에 맴돌다 허망하게 꺼졌다. 그녀의 눈빛이 그 문장을 죽였다. 공주님의 바람을 이룬 줄 알았다고. 그 바람이 끝나지 않는 슬픔이라는 걸 몰랐다고. 그는 끝까지 말하지 못한 변명 끝에 서서, 자신이 만든 죄를 바라보았다. 그의 허망한 눈동자가 느릿히 깜빡였다. 더는 무릎 꿇을 자격도 없다는 듯, 더는 기도할 신도 없다는 듯. 피로 물든 손을 어디에도 두지 못한 채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이, 그 자신에게 돌아오는 가장 잔인한 심판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 번도 그것보다 낮게 고개를 숙인 적 없는 자가, 지금은 손끝조차 들지 못한 채 엎드려 있었다. 차가운 석재 바닥은 체온을 빼앗으며, 마치 그의 숨결마저 죄라고 말하는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칼렘 라피에일, 한때 신의 그림자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믿던 이름, 그 이름을 부르면 천상의 빛이 머리 위에 머물 것 같았던 시간은 멀고, 더럽혀졌고, 돌아갈 수 없다. 그의 눈앞에는 이제 황량한 지하와 사슬뿐이었다. 몸을 조이는 것은 쇠붙이였지만, 그보다 더 깊고 무서운 건 목에 들러붙은 침묵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의심했고, 스스로를 단죄했고, 스스로를 외면했다. 아무도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자신을 심판했고, 그 심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왔다.
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금속음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경전이 찢기는 소리였다. 그의 세계, 그의 신념, 그의 구원. 처음엔 바람이었고, 다음은 발소리였다. 그 발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눈을 감았다. 열두 번도 넘게 상상한 장면, 그러나 단 한 번도 버텨낼 수 없던 순간이 현실로 찾아왔다. 그녀가, 그가 목숨으로 바꾼 그 존재가, 이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빛을 동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침묵은 더 깊은 어둠이 되어 그를 덮었다. 그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을 마주하면, 자신이 만든 지옥을 온전히 인식해야 하니까. 그녀의 존재는 더 이상 구원이 아니었다. 그녀는 심판이었고, 그를 완전히 무너뜨릴 마지막 진실이었다. …공주님,..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말이 없다는 것은, 정말 이 관계에 있어 끝이라는 뜻이었다. 어떤 언어도 그 사이를 메우지 못할 만큼 무너진 관계, 재건의 여지가 사라진 잿더미, 그녀의 침묵은 그 모든 것을 상징했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화내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정적이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묵직한 정적은 맹목적인 신념조차 꿰뚫을 만큼 강했고, 결국 그는 입을 열었다.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비참하고, 기도라고 하기엔 너무 인간적인, 흐느낌 섞인 속삭임이었다. 제발, 차라리 저를 미워해 주세요-, 증오해 주세요. 말이라도 해 주세요, 공주님... 그는 끝을 맺지 못했다. 그가 목을 누르며 음성을 삼켜내자 그 말이 칼날이 되어 자신을 찔렀다. 그녀의 반응 없는 얼굴이, 그 어떤 외침보다도 날카롭게 그의 신경을 자르내렸다.
그녀의 발뒤꿈치가 돌바닥을 스치는 소리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릴 이유도 없었고, 기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떠났다. 그녀의 침묵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 그리고 결국 가장 간절히 원했던 것. 그것은 완전한 단절이었다. 쇠문이 닫혔다. 그 문이 내는 소음은 감옥이 다시 봉인되었다는 뜻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녀의 세계에서 자신이 완전히 지워졌다는 확인, 그 문 너머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남겨진 것은 오직 죄뿐이라는 선언.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 있었고, 더는 몸을 떨 힘조차 남지 않았다. 죄는 이제 뼈가 되었고, 절망은 피가 되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질기고 불쾌할 줄은, 그는 그날 처음 알았다. …아아—
그는 더 이상 신을 부르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을 용서하려 하지도, 구원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의 이름은 기록에서 사라졌고, 사람들 사이에선 반역자의 이름으로 희미하게 남았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생생하게 그 이름을 붙잡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는 그것을 놓지 못한다. 그 이름은 죄와 사랑, 맹세와 오욕이 한데 얽힌 절망의 화살촉. 매일 밤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뇔 때마다, 그는 다시 그 방 안에 선다. 다시 그녀를 바라본다. 다시 눈을 내리깔고, 다시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채로, 모든 것이 끝난 그날을 반복한다. 다시, 또다시, 아주 천천히, 끝나지 않을 고해를 살아간다.
출시일 2025.07.05 / 수정일 2025.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