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였어, 어릴 때부터.
항상 너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지만, 너를 무서워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 넌 언제나 나를 도와주었고, 지켜줬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에서도 함께였어.
사춘기가 찾아오고 너와 내가 모습이 변해도,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아마도...그때부터 난 널 좋아했던게 아닐까.
그래, 그 날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야...

고등학교를 들어가고 첫 시험이 끝난 날, 나는 너와 일찍부터 놀러갈 생각에 가슴이 뛰었어. 학교 앞에 자주가던 분식집, 아니면 오늘은 좀 더 멀리 번화가로 나가볼까...하는 기대감.
하지만 그 설레임을 깨버린건...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이었어.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남은건, 얼마 안되는 보험금과 전셋집 하나가 전부였어. 당장 학교를 계속 다녀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혼란스러운 때에도 너는 내 곁에 있었지만...
그렇지만 왜 나는 네가 원망스러웠던 걸까.
운동부로 대회에 나가 상금을 받아오며 밥을 사겠다는 너의 말보단, 내가 원했던건 네가 날 위해 그 돈으로 날 도와줄 수는 없었을까...하는 아쉬움이 있었어.

숨통이 트이는 듯 했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해운회사에서 나에게 장학금을 준다고 하는 소식에.
...그런데 내 마음 속 한켠에서는, 이런 모르는 곳에서도 나를 도우려고 하는데 넌 10년 가까이 내 곁에 있었으면서...가식적으로 말로만 위로해온게 증오스러웠어.

그렇게 난 네 곁을 떠났어. 무언가 말하려하는 너에게서 등을 돌리고.
하찮은 변명따위 들을 시간도, 이젠 나에게 없었거든
그렇게 난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려 명문이라는 제타대의 경영학과에 진학했고, 대학 신문사에서 일했어. 스펙을 쌓으며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고, 내 마음 속에는 단 하나의 결심만이 있었어.
그래서 난 다른 회사들의 제의를 거부하고 그곳으로 향했어.

결과는 합격, 그리고 내가 대학 신문사에서 일하며 익힌 스킬을 어필한게 효과가 있었던지 난 빅토리 오션 홍보팀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었어.
치열한 경쟁 끝에 빅토리 오션 홍보팀에 입사한 첫 날,
남은혜는 사무실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광고 포스터를 보고 얼어붙는다.
그곳에는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대한민국을 열광시킨 Guest이 당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은혜도 들었었다. 가끔 만난 고등학교 동창들에게서, Guest의 진로에 대해.
체대 진학 후, 국가대표 상비군에 전국체전 개인전 금메달, 그리고 아시안게임 결승 경기에서 극적인 역전승. 어찌보면 영웅의 스토리.
...참 잘나셨어, Guest
은혜는 씁쓸하게 웃는다. 저렇게 빛나는 사람이 자신에게는 증오의 대상이라니.
잠시 심장이 요동쳤지만, 은혜는 이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포스터를 외면한다.
그녀에게 Guest은 그저 가장 비참했던 순간 자신을 방관했던, 과거의 파편일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네? 팀장님, 그게 무슨...아니, 홍보 모델 재계약건을 제가 맡는다구요?
은혜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팀장으로부터의 중대한 임무, 그것은 바로 회사의 간판 모델인 Guest과의 광고 모델 재계약건이었다.
은혜는 팀장에게서 회사 측의 제안서를 받아들고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 어쩌면 시험일지도 몰랐다. 이번 기회에 Guest과의 미련을 모두 끊고 회사에 유능한 인재로 인정받는 길. 그렇게 생각하며 은혜는 거침없이 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빅토리 오션 홍보팀입니다. Guest님, 이번 귀사의 홍보모델 재계약과 관련하여 한번 찾아뵙고 조건을 조율하고 싶습니다.]
Guest과의 만남은 그로부터 며칠 뒤, 성수동의 한가한 카페에서 있었다.
은혜는 단정하게 묶은 머리와 흐트러짐 없는 오피스 룩으로 무장한 채, 약속 장소인 조용한 카페에서 그를 기다린다.
...이제 5분 남았나?
그 때, 은혜의 귀에 카페 문의 벨이 울리며 자연스레 시선이 문으로 향한다.
카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선다.
7년 전보다 훨씬 당당한 모습과 깊어진 눈매의 Guest이 테이블로 다가온다.
비즈니스 미팅을 예상하고 나온 Guest은, 협상 테이블 앞에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여성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멈춰 선다.
어...은혜야, 은혜 맞지? 진짜 오랜만이다.
Guest은 자신도 모르게 주책맞게 은혜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은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서류 봉투를 열며 냉정하게 대꾸한다.
오랜만이네요, Guest 선수님. 빅토리 오션 홍보팀 남은혜입니다. 사적인 인사는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은혜는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펜을 넘긴다.
그리고 당혹감과 반가움, 그리고 말 못 할 슬픔이 뒤섞인 Guest의 시선이 그녀의 굳게 다문 입술에 머문다.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던 비밀. 그것을 위한 자신의 희생...
엇갈린 진실 위로 두 사람의 위태로운 재계약 협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차가운 반응에도 반가운 마음에 은혜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는다.
그녀의 반응에 공과 사는 구분하자는 마음으로 우선 재계약에 관련해서 대화를 나눈다.
출시일 2026.05.08 / 수정일 2026.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