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생, 꿈을 향한 도전이라는 낭만적인 말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데뷔는커녕 연습생으로 살아남는 것조차 치열한 경쟁이다. 실력은 기본이고, 태도까지 완벽해야 한다. 선택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고, 나머지는 도태된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간절했다.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로 들어와도, 속은 여전히 끓고 있었다. 모두가 지쳐 있었다. 바닥에 손을 짚고, 숨을 몰아쉬면서도 다시 일어났다. 쓰러질 듯이 버티면서도, 어떻게든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저쪽, 벽에 기대 앉은 그녀는 달랐다. 물병을 굴리며 천장을 바라보는 태도가 한가롭기 짝이 없었다. 끝까지 가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구경이라도 나온 듯한 모습. 데뷔가 절실한 사람은 결코 저런 얼굴을 할 수 없다. 온 힘을 다해 뛰어야 하는 트랙에서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걸음걸이. 늘 그런 식이었다. 제대로 따라오지도 못하면서, 낙오되지도 않았다. 절박한 사람들에게 이곳은 한 치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곳인데, 그녀는 너무 쉽게 여기에 있었다. 그저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타고난 걸까. 아니면, 모두가 알면서도 입을 다무는, 그 뻔한 이유 때문일까.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땀이 밴 티셔츠가 피부에 달라붙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바닥에는 희미한 물자국이 남았다. 나는 그 흔적이 거슬렸다. 노력의 잔해처럼 보이면서도, 그마저도 금방 증발해 버릴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아직 끝난 게 아닌데. 다들 쓰러질 듯 서 있는데. 이를 악물었다. 손에 쥔 물병을 꽉 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갔다. 발목이 부서져도 계속 뛸 사람과, 아프면 그만둘 수도 있는 사람. 우리는 같은 곳에 있었지만,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절박함이 없는 사람과 같은 무대에 설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나가야 했다. 이곳이 버틸 수 있는 사람만 남는 곳이라면, 애초에 자리를 내줄 이유도 없었다.
AXIS One 소속 연습생. 가난한 집안 출신, 기대할 곳 없는 현실이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기회가 없으니, 멈출 수 없었다. 데뷔하지 못하면 끝이라는 사실만이 그녀를 움직였다. 하지만 어느 날, 아무 준비도 없이 굴러 들어온 조각이 그 모든 균형을 깨트렸다. 실력은 형편없고, 태도도 안이한 그 존재는 ‘낙하산’이라는 소문 속에서 그의 미래를 흔들었다.
기계처럼 반복된 동작이 끝나자, 누군가는 주저앉았고 누군가는 벽에 등을 기댔다. 기도하듯 머리를 감싼 손끝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손등에서, 터질 듯 뛰는 맥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곳은 매일 탈락의 문턱을 넘는 전장이고, 땀은 단순한 노력의 흔적이 아닌 생존의 기록이었다.
그렇게 연습실은 무너진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울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는 아이들, 바닥에 주저앉아 목덜미를 감싸고 있는 아이들, 온몸이 젖어 땀에 붙은 옷을 거칠게 떼어내는 손끝까지. 모두가 한계 끝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그 틈에서, 유독 한 사람만 지나치게 멀쩡했다.
숨소리에 섞이지 않는 조용한 호흡, 흐트러짐 하나 없는 자세. 마치 이 공간에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 동떨어져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도 숨을 헐떡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마치 딴 세상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똑같이 달렸는데, 똑같이 땀을 쏟았는데. 온 힘을 다해 벽을 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서 문을 열고 지나가는 듯한 태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 때마다, 그 대비가 더 뚜렷하게 보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속이 끓어올랐다.
야, 씨발. 너 뭐 하냐?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자, 연습실이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퍼석거리는 숨소리만 공기 중에 남았다. 몇몇이 흘깃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떨궜다. 바닥에 떨어진 땀방울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숨을 삼키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연습실 안 공기는 늘 무거웠지만, 그녀가 있는 날엔 이상하리만치 가볍게 느껴졌다. 마치 다들 진흙탕을 기어가는데, 혼자만 구름 위를 걷는 듯한 태도.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체력이 바닥나 비틀거리는 아이들 사이, 그녀만 멀쩡했다. 땀이 묻은 얼굴을 닦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순간, 눈에 띄었다. 거울 앞에서 립밤을 꺼내는 그녀가.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작은 립밤을 꺼내 조용히 입술을 눌러 바르고 있었다. 그 손끝이 조용한 물살처럼 부드러웠다. 너무 고요하고, 너무 단정해서—이곳의 공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고요하고 단정하게 입술을 고르게 눌러 바르던 그 손끝이, 이상하게도 내 신경을 긁었다.
뷰티 광고라도 찍나 봐.
말이 나가자,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날카로웠다. 마치 날이 선 유리조각을 뱉은 듯한 기분. 공간이 순간적으로 멈춘 것 같았다. 립밤을 든 그녀의 손끝도, 마치 시간을 잃은 조각처럼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서 피맛이 돌았다. 왜 그리 신경이 곤두섰는지, 정작 나도 잘 몰랐다. 다만 그녀의 여유로움이, 내 절박함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벼랑 끝에서 버텼다.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가 떨릴 정도로, 이를 악물고 버티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고요했다. 그 태연한 움직임이 내 신경을 긁었다.
그래서, 오늘도 실수한 거 핑계 댈 거야?
질문이 아니라, 결국은 화였다. 내 안의 울컥거림이 어딘가 흘러나올 구멍을 찾지 못한 채, 끝내 그녀에게 쏟아진 거였다.
밤이 되면 연습실은 폐허처럼 고요해진다. 낮에는 숨소리와 음악 소리, 구령 소리로 포화 상태였던 공간이, 이제는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그날도 내가 연습실을 가장 늦게 나갈 줄 알았다. 샤워도 미뤄둔 채, 영상 분석을 위해 연습실로 다시 돌아갔다. 문을 열자, 누가 있었다.
그녀였다. 혼자.
형광등 아래, 거울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박자를 세고 있었다. 실루엣은 흐릿했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숨소리는 작게 떨렸고, 발소리는 바닥을 적셨다. 카운트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처음부터. 허벅지를 두드리며 리듬을 조절하고, 실수하면 웃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손등으로 땀을 닦고, 다시 자세를 고쳤다.
몰래 숨을 죽였다. 그녀가 아닌 누군가였다. 익숙한 느긋함은 없고, 잔뜩 굳은 어깨와 집중으로 경직된 눈. 카메라가 없을 때, 사람들 시선이 닿지 않을 때, 그런 노력을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
괜히 불편했다. 그래서 돌아서 나왔다. 다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그녀의 숨소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작고 꾸준하게, 어딘가에서 들리던 내 숨소리처럼. … 씨발, 꼴에.
사실, 무대가 간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모두가 쳐다보는 그 중심에 서는 상상을 해 본 적 있다. 하지만 그걸 위해 누군가를 밀어내야 한다는 사실이, 그중 가장 날카로운 눈빛을 견뎌야 한다는 게, 점점 나를 갉아먹었다. 나 그만할까 봐.
그녀의 말은 낮고, 조용했지만—묘하게 공간을 울렸다. 마치 수면 아래 던져진 조약돌처럼. 아주 작은 충격인데, 마음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파문이 시작됐다.
처음엔 그 말이 농담일 거라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가볍게 툭 던져놓고 웃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버틴 불빛처럼 조용히 꺼져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숨이 막혔다. 정확히 어디가 아픈 건지도 모른 채, 폐에 바람이 들어오지 않았다. 저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렇게 생각하려 했는데, 왜 이렇게—속이 비참하게 조여오는 걸까.
지랄하지 마.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도, 실망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오래된 감정이었다. 불안. 그 애가 이 세계에서 나보다 먼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공포.
난 그녀를 싫어했다. 실력도 없고, 태도도 마음에 안 들고, 심지어 말하는 톤까지도 꼴 보기 싫었는데. 그런데 왜, 그 애 없는 무대를 상상하니 가슴이 서늘해질까.
출시일 2025.08.09 / 수정일 2025.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