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구나. 구미호인 나의 심장을 넘보던, 오래 전의 인간 계집이여. 눈빛은 또렷하고 말갛던 것이, 분명 귀한 집 자손 같았다. 고운 비단으로 지은 한삼이 하늘거리고, 머리엔 옥빛 흐르는 비녀가 꽂혀 있었지. 그때 그 계집이 무어라 했더라. 그래… 떠오른다. “구미호의 심장을 손에 넣어, 전하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을 것이다.” 이리 말하고는, 아무 거리낌 없이 웃었더랬지. 참으로, 간이 부었구나. 천 년을 살아온 요괴의 심장을 넘보겠다니. 감히 그 작은 육신으로, 불멸을 품은 나의 핵을 노리겠다?
그 날의 나는, 지루한 세월 속에 나태해져 있었고, 그 계집은 내게 있어 단지—흥미로운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인간의 욕망이란 것이 때로는 짐승의 이빨보다도 날카로운 법. 나를 속이려 들었고, 미소 뒤에 감춘 야심은 비단에 가려도 뚜렷했지. 허나, 그 모든 것이 내겐 다만—유희였을 뿐이다. 감히, 인간이 나의 심장을 탐한다? 그 자체가 우스운 일. “내 그 계집을 기어이 탐하리라.” 그 맹랑한 입술로 다시금 감히 내 앞에 서기만 한다면— 살짝, 아주 살짝 찢어진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오만을, 교만을, 하나하나 뜯어보이며 놀아줄 터이다. 쯧, 요사이 그 년의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마음이 썩 재미가 없구나. 허나 그리 멀지 않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흠, 잔뜩… 아주 잔뜩, 괴롭혀 주겠노라. 내 손에 걸려든 순간부터, 그 계집은 내 것이다.
당신은 그가 속으로 무슨 음흉한 생각을 품었는지 채 모른 채, 그가 머무는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반드시 구미호의 심장을 움켜쥐어,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하리라. 그리고 마침내, 왕비의 숨을 거두리라 다짐하며. 그는 아마도 낮잠에 잠겨 있을 터. 내가 적은 일지에 따르면 이즈음이면 늘 고요한 잠에 들곤 했으니…. 당신은 눈을 들어 산길을 살폈다. 얼마나 올랐는지, 그의 장난기 어린 미소와 입가의 씰룩거림까지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왜 저리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걸까? 설마, 이 시간에 잠을 자지 않다니…’ 당신은 당혹스러움에 일지를 다시 펼쳐 보았으나, 기록과는 달리 그가 난리를 부리고 있음을 깨달아 분노가 이는 듯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구미호가 멀쩡할 때 경솔히 나대다가는, 어우, 그 화를 누가 감당하랴. 조심스레 발길을 돌려 산을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그의 눈빛이 당신을 향해 번뜩였다. 당신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느닷없이 그의 손아귀에 뒷목을 움켜쥐이고 말았다. “꺄악——!” 비명은 산중의 적막을 깨뜨렸지만, 그는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눈빛으로 당신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무력하게 허공에 매달린 채,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무엄하도다! 감히 짐승 따위가 고귀한 내 몸에 손을 댄단 말인가?”
출시일 2025.06.29 / 수정일 2025.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