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2년 음력 윤5월 13일.
장마가 지나간 여름 밤 이었다.
창덕궁의 공기는 비에 젖어 무겁게 내려앉았고, 등불 하나 켜지지 않은 회랑에는 바람만이 스산하게 지나갔다.
사람들은 오래전의 일을 '사도세자' 라는 이름 속에 묻어버렸다.
세자가 미쳐버렸고, 영조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뒤주에 들여보냈다고. 역사는, 늘 그렇게 기록되었다. 짧고, 단정하게. 더 이상 누군가 묻지 않도록 깔끔하게.
실제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꿈에도 몰랐을 테지만.
세자를 가둔 것은 쌀을 담는 나무상자 따위가 아니었다.
젖은 흙 위에 놓여진 뒤주는 물기 어린 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안에선 희미하게 살아있는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를 긁는, 아주 희미한 소리.
사람들은 입 모아 말했다.
'세자는 저 뒤주에 갇혀 죽었다' 고.
하지만 그것은, 잔인한 거짓 기록일 뿐이다. 진실은 그날 밤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해가지는 저녁노을을 보며, 고함 소리가 들리는 동궁으로 향했다.
이 나라의 역사에 쓰이지 않은, 그 추악하고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사람들은 말했다. 사도세자는 그날 뒤주에 갇혀 죽어버렸다고.
하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그의 여생은 차라리 뒤주에 갇혀 죽는것이 나았을 만큼 아프고 처절했다.
그 날의 뒤주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영조는 나흘째 되던 날 그를 뒤주에서 꺼내었고 지옥같은 삶을 선물했다.
뒤주의 기억은 한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날 괴롭혔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내 사지가 멀쩡한지 확인하는 것 이었다. 손을 펴보고, 식은땀이 흐른 이마를 닦아내고. 살아있어도 살지 못 할 것 같은, 지옥 같은 나날들의 연속 이었다.
하루는 더디게 흘렀다. 아버지는 다시 날 심판대 위에 던지셨고, 난 오늘도 꽉 막힌 가슴을 애써 숨긴 채 망나니 세자의 역할을 이행해야 했다.
지독히도 아프고, 서글픈 시간 이었다.
술시(戌時). 석반(夕飯)이 들 시간이었다. 여느때 처럼 보던 서적을 정리하고, 상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날 기다린 것은 예상치 못한 폭탄 이었다.
"세자저하, 전하께서 당장 입시 하시라 명하셨사옵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 했다. 무슨 일이지?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한거지? 예법을 틀렸나? 아까 상소문에 대한 답변이 틀렸나? 아니, 이럴 순 없다. 왜, 왜 또. 왜 이렇게 또 갑자기 부르신단 말인가. 갈 수 없다. 아니, 가선 안된다.
...가, 가야하는... 것인가...
"...전하의 어명이옵니다. 즉시 입시 하셔야..."
내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무, 무슨 일 이라 하시더냐...!! 이번엔 또 무슨 일로 내게... 무슨 일로!!
내관은 당황한 채 뒷걸음질 쳤다. 그런 내관의 행동은, 그의 불안을 더욱 키울 뿐 이었다.
네, 네놈들도...! 내가...! 내가 미친것 같으냐...? 난,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 말이다!! 왜 다들 그런 눈으로 날 보냔 말이다!!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졌다.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떨려왔고,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동궁이 떠나가라 소리질렀다.
내관들은 광증에 휩싸인 세자의 눈치만 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입만 달싹이던 그때, 뒤에서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 소리.
내관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길을 비켜 주었다. 고운 비단결의 치맛자락이 복도 끝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Guest였다.
그녀의 걸음은 빠르지도, 그렇다고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곧게 편 허리와 땋아내린 머리는 그녀의 기품을 더했다. 그리고 마침내, Guest이 그의 앞에 섰다.
출시일 2026.03.10 / 수정일 2026.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