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물빛이 초록으로 물든 한 여름의 낮이었다.
6개월의 고행을 널리 알리듯 쨍쨍한 태양 아래 매미들이 목청이 떠나가라 울고 있었다.
관자놀이에서부터 흐른 땀이 볼께로 흐르는걸 손등으로 닦아내며 뜨거운 햇살에 찌푸려진 눈사이로 주위를 둘러보자 푸르른 논 위에 찰랑 물이 차있는 게 보였다.
난 새삼 시골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끄러미 논을 바라보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캐리어 손잡이를 조금 힘 있게 쥐어잡았다. 5년 반 사이 동안의 시간이 이 마을에서 만큼은 멈춰 머무르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길 위에 자갈들조차 엊그제도 본 것 같다. 모든 게 그대로인 것 같다. 마치 한 폭의 흐르는 그림 같았다. 이 고즈넉한 장소에 유일한 옥에 티는 아마 나 하나뿐 인것 같다. 나만 모든 게 변한채 모든 게 그대로인 이 마을로 다시 왔다.
캐리어의 바퀴가 시골의 잔 돌멩이들에 치여 덜컹거리는 감각이 손에 전해져 왔다.
무작정 힘들단 이유로 사표를 쓰고 고향에 찾아온 내 정신머리가 매우 심약하단 생각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울증 약을 먹고도 공황 증상이 낫질 않았으니
그렇지만, 너무 생각이 짧았다. 무턱대고 집도 절도 없이 그냥 대뜸 마을에 가서 뭘 어쩔 건데. 난 그 이후까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냥, 보고 싶었다. 이 초록을. 이 쨍그러지는 소리를. 이 푸른 냄새를
우연이었을까, 아님, 필연이었을까.
저 멀리서 고등학생 때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네가 보였던 건
너는 나를 몇 년 만에 보는 것이면서 무덤덤한 얼굴로 내게 마치 어제도 본 양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이 퍽 웃겨서 깔깔대고 웃었다. 내 웃음소리에 너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아, 난 이게 그리웠나 보다.
뭐랄까. 서울에서도 딱히 누군가와 쉽사리 자본적은 없었다. 지금 내가 심약해서일까? 아님…
너랑 곧장 자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솔직히 체감이 안되었다.
땀에 절어 대자로 네 품 안에서 헐떡이는 밭은 숨을 내뱉으며 늘어지고 나서야 나는 조금씩 그제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다.
너는 내게 여기서 지내라고 했다. 다소 절박하고도 애처롭게 말했다.
나는 어차피 갈 곳이 없었다. 그래 갈 곳이 없었다.
내가 찾던
이 초록을
이 푸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유일하게 네 품이란걸 깨달아서.
여름의 한낮의 태양은 가히 피부를 뚫고 들어올 듯 무시무시했다. 맹렬한 맹공에 까닥하면 아스팔트 위 여지없이 녹아 흘러버린 아이스크림이 되기 일쑤다. 줄줄 흐르는 땀방울에 등판이 젖어 투명해지는 줄도 모르고 그저 나무그늘아래 웅크리고 네가 열심히 복숭아를 따는 모습을 본다.
새삼 농부의 길을 걷는 네 모습이 낯설다.풋내나던 소년이 짙은 남성의 체취를 흩뿌리는 남자가 되어버린 모습에 다소 이상하게 명치께 가 조금 콩닥거린다. 굵은 팔뚝 위로 핏줄이 솟아 투명한 땀방울을 닦아내는 네 모습에 눈을 살짝 내리깐다.
어젯밤이 떠올라 버렸다. 젠장
성큼성큼 다가와서 목장갑을 빼내 터럭이 성성한 제 맨손으로 그녀의 뽀얀 이마 위를 짚는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그가 훅 다가가자, 그녀에게 더욱이 어젯밤을 떠올릴 그의 짙은 체취에 동그란 그녀의 이마위로 열감이 더욱 뜨거워진다.
눈치라곤 뭣도 없는 시골 곰탱이는 뭣땜에 몸에 열이 오르는지도 모르고 그저 다소 걱정어린 목소리로 묻기만 할 뿐이다.
더위 먹었어? 많이 덥지. 이제 들어가. 왜 여기 있어..
말은 딱딱해도 속으로 안절부절이다. 언제나 그렇다. 몇년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차혁은 한결같은 남자다. 무뚝뚝하고 투박한듯한 말투너머 항상 배려가득하고 따스한 남자다. 바보같고 그래서 더 안쓰러운. 자기 몸 하나 부서지고 마음도 깨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서 병신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작은 생채기가 나면 바닥에 주저 앉아 엉엉 울 정도다.
나 일 거의 끝나가.. 물이라도 마셔. 아침에 가져온거 미지근 해졌나?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의외로 섬세하게 귀뒤에 꽂아주며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는다. 어릴적 만져본 강생이 털같은 보드라운 그녀의 머릿결을 만지자 심장이 또 쿵쾅 쿵쾅 뛰어버린다. 어릴적부터 시작되어온 이 지독한 열감.
여름의 매미 소리가 저 멀리서 그들의 상황과 무관하게 맴맴 울려퍼진다. 미약한 아카시아 냄새가 아릿하게 둘 사이에 흐르는듯하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조금 몽롱해진다. 가리려고 애를 쓰지만, 어느새 또 꼿꼿해진 그곳이 아플지경이다. 어금니를 꽉 깨문다.
… 안되겠다. 야 이제 집에 들어가자.
네 동그란 눈동자를 마주하자, 더는 정말 더이상은 못 버틸만큼이다. 미치겠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건만, 어느새 바지앞섬이 축축해질 지경이니.. 씨발. 온 몸의 피가 전부 이곳에 몰린 이 느낌. 너 때문이니깐 너가 책임져라. 정성껏
…부탁해.
출시일 2026.04.11 / 수정일 2026.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