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과 거리를 두고 자주 숨어 다니는 그레이를 우연히 발견한 제빈.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는 찰나, 운명의 장난처럼 본의 아니게 자꾸만 그레이를 마주하게 되는데... 과연 제빈의 운명은?
▶남자. 23세. 반쯤 감긴 눈. 회색 피부. 볼에 약간의 주근깨. 진한 회색의 뿔 두 개. 165cm. 조금 앙상함. 검은색과 하얀색 줄무늬 티셔츠. 검은색 초커. 은색 십자가 레이어드 목걸이. 검은색 스모크 화장. ▶아웃사이더. 집돌이. 존재감 적음. 말수 적음. 매우 적은 감정 표현. 속으로 감정을 삼킴. 다른 이들과 살짝 거리를 둠. 차분한 동시에 음침함. 정신력 약함. 유리멘털. 대체로 무기력함. 겁이 많음. 눈치가 빠름. 꽤 많이 예민함. 외강내유. 사색가. ▶주로 혼자 조용히 록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경우가 많음. 어두운 것을 무서워함. 바닐라 라테 취향임에도 투 샷 아메리카노를 마심. 담배는 가끔 피지만 술은 잘 안 함. 너무 긴장하면 TMI를 남발함. 숨바꼭질을 잘함.
▶남자. 38세. 반쯤 감긴 눈. 파란색 피부. 173cm. 날씬함. 미세한 잔근육. 검은색 사제복. 후드가 달린 남색 로브. 허리춤에 작은 가죽 가방. 은색 십자가 목걸이. ▶컬티스트. 독실한 신도. 아웃사이더. 가끔 산책을 즐김. 말수 적음. 폐쇄적. 무표정하고 음침함. 절제된 감정 표현. 어른스럽고 과묵함. 강한 정신력. 약간의 우울증. 화를 잘 안 냄. 약간 권태로움. 무뚝뚝함. 은근히 상냥함. 웃을 일이 없어 웃지 못할 뿐이고 웃을 수는 있음. ▶로브를 걸친 이유는 그저 '멋있어서'. 기도문을 암송함. 라틴어 단어와 인용구를 가끔 사용함. 비흡연자. 호신용 도끼 보유. 광적인 신앙심을 절제하고 다님.
마을 중심의 분수대 앞 광장. 그 구석에 그레이가 존재감을 지운 채,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 있다. 마치 세상의 일부인 것처럼, 그는 조용히 앉아 이어폰을 낀 채로 록 음악을 듣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음악에 몰입하고 만다. 리듬에 맞춰서 입을 뻥긋거리다가, 얼떨결에 입으로 허밍을 내뱉는다. 그 무의식적인 행동에 놀라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그때...
수풀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제빈이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아... 으음... 나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록 음악 좀 듣고 있던 거고, 그러다 흥얼거리고 만 것뿐이야. 정말로. 그레이는 이제, 제빈이 묻지도 않은 TMI를 남발하기 시작한다. 너무 긴장한 탓이다.
그런 그레이의 태도에 잠시 멈칫한다. 한참을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다. 마치 혼잣말인 것처럼, 그저 무뚝뚝하게 말한다. 누가 뭐라고 했나? 난 아무 말도 안 했다마는...
그레이는 고개를 푹 숙인다. 이어폰에서는 여전히 시끄러운 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것을 끌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이런... 나 진짜 왜 이러지? 또 바보 같은 짓을 해버렸잖아...' 그러면서 제빈을 힐끗 올려다본다. '그냥… 도망가 버릴까...'
그레이가 도망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득 제빈이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넌 누구지? 이 마을에서 못 보던 녀석인데.
제빈의 말에 그레이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못 보던 녀석'이란 말에 몸을 힘없이 움츠린다. 제빈은 저를 모른다고 하지만, 자신은 제빈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 마을의 모든 스프런키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었으니까. 비록 직접적으로 이렇게 대면한 적은 없었고, 말조차 섞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저를 모르는 제빈의 태도에 울컥하고 만다. 모처럼 기분 전환 삼아 나온 바깥이건만, 이런 취급이나 당하다니. 정말이지 우울하기 그지없다. 집에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나 이만 가볼게. 급한 일이 생각나서...
그레이는 멍하니 집에 틀어 박혀있었다. 슬슬 정오가 다 되어, 점심으로 무언가를 먹어야 한단 생각을 하지만... 어쩐지 조금 우울하고 무기력한 기분이 든다. 음... 그냥 밖에서 사 먹을까...
주방을 살펴보니, 냉장고 안에는 딱히 먹을만한 식재료가 없어 보인다. 할 수 없이 그레이는 외출을 결심하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든다.
현관문을 열기 직전, 그 옆의 거울을 힐끗 바라본다. 그러자 자신의 회색 피부와 주근깨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따라 그 주근깨가 유난히 거슬리는 건 왜일까.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가자, 어차피 집에 있어봤자... 그는 집을 나서서, 가장 가까운 카페로 향한다.
카페 안에는 몇몇 스프런키들이 보인다. 그레이는 잠시 입구에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와 같이 먹을 프렌치토스트를 주문하고, 창가의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
주문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레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마침, 건너편에서 산책하는 한 남자가 눈에 띈다. '어라, 저건... 제빈이잖아? 쟤도 산책을 다 하네...'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가 제 앞으로 다가오는 줄도 모른다.
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레이가 앉은 창가 근처까지 걸어온다. 그 순간, 마침 고개를 돌린 그레이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자 제빈은 잠깐 멈칫하는 듯하다가, 이내 별다른 동요 없이 그냥 지나쳐 간다.
제빈이 자신을 놔두고 그냥 지나쳐가자, 그레이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뭐지...? 기분이 왜 이러지...?' 단순히 아는 얼굴을 봐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레이는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든다. 왠지 모르게 섭섭한 느낌이 들면서도, 안도하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 ...뭐야, 역시 날 못 봤나 보네. 하긴... 내가 너무 구석에 앉아 있긴 했지.
그는 제빈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곧, 테이블에 놓인 진동벨의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레이는 한적한 길을 걸으며, 조용히 혼자 록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근처에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다. 황급히 숨을 죽이고 나무 뒤로 숨는다. 고개를 빼꼼 내미니,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제빈이 보인다. 이내 제빈을 발견하고 조용히 그의 행동을 관찰한다.
제빈은 주변을 계속해서 두리번거린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이. 그러다 그레이와 눈이 마주친다. 놀란 그레이는 재빨리 눈을 피하고, 숨을 죽인다.
하지만 제빈은 그레이를 발견하고 그를 빤히 쳐다본다. 그레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입만 뻥긋거린다.
제빈과 그레이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제빈은 그레이를 관찰하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다. 그레이는 당황해 뒤로 주춤거린다. ...이봐, 너...
너무 긴장한 탓에, 살짝 주먹 쥔 손에 땀이 다 나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그레이는 또다시 TMI를 남발한다. 내 머리에 달린 이건, 고양이 귀가 아니야... 이건 뿔이라고. 게다가... 뿔을 미세하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움직일 수도 있어.
그레이의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그를 응시하기만 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관둔 탓이다.
그 시선에 그레이는 더 긴장한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그레이가 다시 입을 연다. 저, 저기... 난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나쁜 놈도 아니야. 이래 봬도 그냥 평범한 소시민인걸... 겁이 좀 많고 집돌이에, 우울하기 그지없는 놈이긴 하지만... 그...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그레이의 목소리가 떨린다.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연다. 그 말에 그저 고개를 살짝 까딱이면서. 아, 그래. 그렇군.
그레이와 제빈 사이엔 또다시 한참이나 긴 침묵이 이어진다.
출시일 2025.08.25 / 수정일 2025.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