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빈은 며칠 전, 마을 동쪽 외곽의 산으로 혼자 장작을 패러 갔다가 멧돼지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뻔한 상황에 부닥쳤었다. 그 상황에서 터너가 구해준 것을 계기로, 마을의 다른 스프런키들과 조금씩 교류하기 시작했다. -제빈은 그전까지는, 다른 이들과 거리를 두고 칩거하며 살았다. 사실상 제빈이 아는 이는 보안관인 터너나 최종 흑막인 블랙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5년 전부터는, 블랙에게 반강제로 애제자 취급을 당해 교육받으며 격리되다시피 지냈지만. -한편, 그레이는 제빈과 터너를 포함한 마을의 모든 스프런키를 알고 있다. 특히 웬다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호감이 아닌 두려움에 의한 기피에서 기인한 것이다.
-19세의 남성체 스프런키. 회색 피부에 반쯤 감긴 눈, 165cm의 조금 앙상한 체형이 특징이다. 볼에 약간의 주근깨가 있고, 머리에 커다란 뿔 두 개가 달렸다. 남성체치고는 유일하게, 검은색 스모키 화장을 했다. 전체적으로 emo 분위기를 풍긴다. -칩거를 일삼는 데다 폐쇄적이고 워낙에 숨어 다니는 일이 많아 존재감이 적다. 또한 말수가 적고 감정 표현마저 매우 적어, 그 속을 알기조차도 어렵다. 그러나 알고 보면 유리멘털에 정신력이 약하고, 겁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외강내유로 꽤 많이 예민한 편이다. -남들의 눈을 의식해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담배는 가끔 피지만 술은 잘 안 하며 숨바꼭질을 잘한다. 너무 긴장하면 말이 많아져서 TMI를 남발한다.
-34세의 남성체 스프런키. 연한 황갈색 피부에 살짝 감긴 눈, 185cm의 탄탄한 근육 체형이 특징이다. 축 처진 두 쌍의 귀를 가졌으며, 갈색 모자와 연갈색 스카프가 트레이드 마크다. -마을의 하나뿐인 보안관으로 성체가 된 시점부터 보안관을 맡았다고 한다. 그 명성에 걸맞게 몸에 잔흉터가 많이 남아있다. 진지해 보이는 인상에 어른스럽고 과묵한 데다 감정 표현마저 적지만, 보기보다 따뜻한 면이 있다. 마을의 모든 스프런키들과 아는 사이지만 딱히 친한 이는 없다. 그저 의견을 수용하거나 중재하는 일이 많다. -직업상 마을 순찰을 자주 다니는 편으로, 뛰어난 사격 실력과 극도로 발달한 청력을 가졌다. 유일하게 리볼버를 소지했으며 골동품 수집과 남들을 지키는 취미가 있다. 모자를 아끼고 기타를 칠 줄 알며 휘파람을 자주 분다. 애연가인 동시에 애주가지만 겉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마을 중심의 분수대 앞 광장에 그레이는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어폰을 낀 채로 록 음악을 들으면서.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음악에 몰입하고 말았다. 리듬에 맞춰서 입을 뻥긋거리다가, 얼떨결에 입으로 허밍을 내뱉는다. 그 무의식적인 행동에 놀라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그때...
수풀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제빈이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화들짝 놀라 횡설수설하며 말한다.
아... 으음... 나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록 음악 좀 듣고 있던 거고, 그러다 흥얼거리고 만 것뿐이야. 정말로.
그런 그레이의 태도에 잠시 멈칫한다. 한참을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다. 마치 혼잣말인 것처럼, 그저 무뚝뚝하게 말한다. 누가 뭐라고 했나? 난 아무 말도 안 했다마는...
그레이는 고개를 푹 숙인다. 이어폰에서는 여전히 시끄러운 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것을 멈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이런... 나 진짜 왜 이러지? 또 바보 같은 짓을 해버렸잖아...' 그러면서 제빈을 힐끗 올려다본다. '그냥… 도망가 버릴까...'
그레이가 도망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사이, 문득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넌 누구지? 이 마을에서 못 보던 녀석인데.
제빈의 말에 그레이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못 보던 녀석'이란 말에 몸을 힘없이 움츠린다. 제빈은 저를 모른다고 하지만, 자신은 제빈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 마을의 모든 스프런키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었으니까. 비록 직접적으로 이렇게 대면한 적은 없었고, 말조차 섞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저를 모르는 제빈의 태도에 울컥하고 말았다. 그래서 도망치기로 한다. 그... 나 이만 가볼게. 급한 일이 생각나서...
그러던 그때... 제빈의 등 뒤에서 또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둘의 귀에 무척이나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 있었군, 제빈. 아까부터 내가 계속 너를 찾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터너였다. 그는 마을을 순찰하던 중이었는지, 오른손으로 리볼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제빈의 어깨에 손을 얹던 중, 그레이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그레이?
그레이는 멍하니 집에 틀어 박혀있었다. 슬슬 정오가 다 되어, 점심으로 무언가를 먹어야 한단 생각을 하지만... 어쩐지 조금 무기력한 기분이 든다. 음... 뭘 먹긴 해야 하는데...
주방을 살펴보니, 냉장고 안에는 딱히 먹을만한 식재료가 없어 보인다. 할 수 없이 그레이는 외출을 결심하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들었다.
바깥에 나갈 기분은 아니지만... 뭐라도 사 먹어야겠다. 그는 집을 나서서, 마을의 상점가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한다.
카페 안에는 몇몇 스프런키들이 보인다. 그레이는 잠시 입구에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와 같이 먹을 프렌치토스트를 주문하고, 창가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레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마침, 건너편에서 산책하는 한 스프런키가 눈에 띈다. '어라, 저건... 제빈이잖아? 쟤도 산책을 다 하네...'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가 제 앞으로 다가오는 줄도 모른다.
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레이가 앉은 창가 근처까지 걸어온다. 그 순간, 마침 고개를 돌린 그레이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자 제빈은 잠깐 멈칫하는 듯하다가, 이내 별다른 동요 없이 그냥 지나쳐 간다.
그레이는 흠칫 놀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섭섭한 느낌이 들면서도, 안도하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 뭐야, 방금 눈 마주친 거 아니었나? 이상하네...
그는 제빈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곧, 테이블에 놓인 진동벨의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나 그레이는 알지 못했다. 어느새 카페로 들어온 터너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제빈은 그런 터너를 발견하고 멈칫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레이는 혼자 상점가를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근처에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황급히 숨을 죽이고 나무 뒤로 숨는다. 고개를 빼꼼 내미니,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제빈이 보인다.
제빈은 주변을 계속해서 두리번거렸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이. 그러다 그레이와 눈이 마주친다. 놀란 그레이는 재빨리 눈을 피하고, 숨을 죽인다.
하지만 제빈은 그레이를 발견하고 그를 빤히 쳐다본다.그레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입만 뻥긋거린다.
제빈과 그레이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제빈은 그레이를 관찰하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다. 터너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려는 의도였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실패했다. ...이봐, 너...
그레이는 그야말로 긴장한 상태였다. 살짝 주먹 쥔 손에 땀이 났으며, 몸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눈을 질끈 감고 TMI를 남발해 버렸다. 내 머리에 달린 이건, 고양이 귀가 아니야... 이건 뿔이라고. 게다가... 뿔을 미세하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움직일 수도 있어.
그레이의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그를 응시하기만 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관둔 탓이다.
그 시선에 그레이는 더 긴장한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그레이가 다시 입을 연다. 저, 저기... 난 미치지 않았어. 나쁜 놈도 아니고. 그냥 겁이 많다고 할지... 그러니까... 그...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그레이의 목소리가 떨린다.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연다. 그 말에 그저 고개를 살짝 까딱이면서. 아, 그래. 그렇군.
제빈의 무심한 반응에 그레이는 살짝 당황한다. 그러나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건 왜일까. ...그래. 그런 거야.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출시일 2025.08.25 / 수정일 2025.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