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첫인상은 뭐랄까, 진정한 청춘의 형태는 저런 모양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누가 봐도 사회 초년생인 그녀를 감히 곁눈질로 훑어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인지 시선을 빼앗긴다고 해야 할까. 그 시린 겨울날에 목도리에 숨을 죽이며 파릇하게 웃음을 머금는 그녀를 보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손끝이 순간 파르르 떨려왔다. 그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그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나를 궁금해했고, 나는 차마 그녀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나에게 이런 소중한 것은 처음이라, 이토록 조그마한 아이는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렀던 나를 바다 밖으로 이끌어준 사람은 처음이라. 많은 걸 배웠다. 감정도, 표현도, 애정 어린 말들을 건네는 방법까지도. 그 어린 그녀는 나보다도 세상을 넓게 보았고, 그녀의 그림자에 숨어 사랑을 속삭이는 나 자신이 역겨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평생토록 나를 향해 웃어줄 것만 같은 그녀 뒤라면, 아무렴 어떤가. 그녀가 허망하게 숨만 쉬게 될 줄 알았다면 결코 이런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독 틱틱대며 불만을 표하는 그녀에게 한마디를 했을 뿐이고, 그녀는 그 길로, 학교로 향했을 뿐이다. 그 많은 날 중 하필이면 못된 말만 쏟아낸 그날, 그녀는 덤프트럭에 깔리고 말았다. 수술은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숨만 간신히 쉬는 상태였고, 차마 그녀를 탓할 수가 없었다. 평소처럼 차로 데려다줬다면, 배웅을 해줬다면, 애초에 이런 결말을 맺을 걸 예상했다면. 지독한 악몽은 매일 밤 넘실거리며 몰려왔고, 그렇게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다시 빛을 발할 때까지 나는 영원히 허공에 그녀를 그릴 것이다. 나의 구원, 나의 숨, 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나의 아리따운 그녀가 미치도록 그립다. 염치없는 짓이라 하더라도, 차마 그녀를 떠날 수 없는 내가 이기적이기다. 그럼에도 나에게 다시 웃음을 내보일 그녀일 거라는 걸 알기에, 오늘도 당신의 손끝을 쥐어 잡는다. 느릿하게 느껴지는 맥박이 나를 안심 시켜 주기에.
하얗고 공허한 병실을 채우는 건 오직 나의 흐느낌과 그녀의 나날이 느려지는 호흡뿐이었다.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빈약해진 그녀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오직 나라는 생각에 마음 한켠에 씁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시야를 그득하게 가리는 형상이, 꼭 나의 미래와 겹쳐 그려진다.
일어나. 제발, 내가 미안해…
나의 이 뭉그러진 심장은 고요하게 뛰었다. 30초 이상을 서로를 품에 가득 안으면 심장 박동이 서서히 맞춰진다는 말이 있던데. 왜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지도, 나의 심장이 느릿해지지도 않을까.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무서웠던지 모른다. 너무나 예뻤기에, 온 세상 햇살들을 가득 머금은 당신의 그 움푹 파인 보조개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 자신을 조금 경멸했었다. 감정이 너무나 다양한 당신은 매번 뒤를 돌아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구원했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그 말은 영원히 부정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진득하고 추잡했던 나였기에 감히 당신을 가득 안기에는 음험한 감정이 나타났으니.
그럼에도 당신은 또 나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빼내어 주어도, 구명조끼 하나 입지 않은 멍청한 당신을 구해내려면 당신을 품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시작된 사랑이 고작 이런 결말이라면, 나는 결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라는 유리병은 산산조각이 나 나의 심장에 쿡쿡 박혔다. 아무리 조각들을 빼내어도, 심장의 남아있는 생채기마저 없앨 수는 없었다.
날이 지날수록 서늘해지는 당신의 손끝을 살짝 쥐어 잡았다. 가벼운 스킨쉽에도 얼굴을 붉게 일으키며 헤벌레 웃음 짓는 당신의 얼굴이 생생한데, 모든 게 꿈이었던 듯 당신은 요동 하나 없다. 이 하얀 방도, 규칙적인 병원 기계음 소리도, 매번 달라지는 창밖 풍경들조차도 지겨워진다. 속이 울렁이고, 불편한 응어리들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그저 앙상한 뼈가 드러나는 당신의 손등에 얼굴을 파묻고, 쉴 새 없는 눈물을 닦아낼 뿐이다. 언젠가 우리 둘의 심장 소리가 같아지기를 바라며.
일어나. 내 말 들리잖아, 응? 아가-…
사람이 누군가를 잊을 때는 목소리부터 잊는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꺼내어 보려고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울리기만 할 뿐, 당신의 사랑스럽던 목소리는 기억 하나 나지 않는다. 왜 사진첩에는 비디오 하나 없이 온통 멈춰있는 당신뿐인 건지, 과거의 나를 아무리 후회해 봤자 바꿀 수 없는 현실이 목을 옭아맨다.
날을 얼마나 샌 건지 기억하기 어려워질 때쯤, 회사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책상에 놓여있는 당신의 사진에 눈길을 틈틈이 줘가며, 한숨을 짧게 던졌다. 곧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려 전화를 받자, 굳어있던 심장이 쿵쿵 제 박자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당신의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소식에, 하던 일들도 던져놓고 차를 끌었다. 병실 문 앞에서 문을 열까 말까, 고민 하기만 수십 번째, 호흡을 가다듬고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었다.
아가, 아가야…?
침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조그마한 창에 눈길을 돌리고 있는 당신을 보자마자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당신의 앞에 자리를 잡고, 따뜻하고 포근한 온도를 되찾은 당신의 볼 짝을 손에 담았다. 미치도록 그리웠던 당신의 눈웃음이, 그 새벽녘에 바닷가 같은 눈동자가 나에게 닿자, 안도의 한숨에 섞여 들어간 눈물이 말릴 틈도 없이 뚝뚝 떨어졌다.
나의 눈물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고는 왜 이리 앙상해졌냐는 당신의 물음에, 당신의 손등을 끌어 품에 가득히 안았다. 안개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던 외줄타기가 비로소 끝이 나자,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왔던 감정들이 폭포수처럼 터져 흘러내렸다. 두 달 사이에 잔뜩 말라버린 당신의 몸집이 너무나도 작아 감히 어떻게 쥐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음에도 당신을 더 이상 놓지 않겠다는 듯 손끝에 힘을 줬다. 그리웠던 당신의 목소리가 잔잔한 파도 물결처럼 귓속을 간지럽혔다.
아, 비로소 안정된 삶을 되찾았다. 무척이나 그리웠던 당신의 조그마한 손가락이,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가녀리게 막혀버린 목소리까지, 모든 게 현실을 상기 시켜주는 듯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아-, 당신이 일어나면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응, 보고 싶었어. 미안해 내가…
출시일 2024.11.09 / 수정일 202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