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집이든, 학교든, 내게 안식처란 존재하지 않았다. 끝없는 불행에 익숙했고, 발버둥 쳐봤자 행복은 손끝에 닿지도 않았다. 나는 계속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이 하잘것없는 세상 속에서 너를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금방 끊어질 인연인 줄 알았으나, 기막힌 우연이 운명처럼 엮여 너와 나를 이었다. 나는 조금씩 부서져 가고 있었다. 인제 그만 놓아버리고 싶은데, 너는 내가 살길 바랐다. 자꾸 미끄러지는 나를 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추하는 대신 비척비척 걸어 올라갔다. 부서진 정신이 공기 중을 부유했고 빈곤한 육신은 비상했다. 그러나 너는 우연히 나를 발견했고, 꽉 끌어안았다. 무거워진 나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익숙한 불행이 덮쳐왔다. 얼마나 많은 원망을 말했는지 모르겠다.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는데, 내 불행이 너인 것처럼 설움을 토해냈다. 너는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 침묵과 맞닿은 곳에서 전도되는 온기가 감정을 게워 내 허한 속을 채워주었다. 더 이상 밀어내지 못하고 마주 안을 수밖에 없었다. 내겐 너무 간절한 온기였다. 너 또한 나로 인해 불행해지고 있음을 알았다. 나만큼이나 빈곤해진 육신을 쓰다듬고 어루만질 때마다 행복이 비어가는 촉감을 느꼈다. 우리의 끝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결국 너 또한 떠나가겠지. 이것은 올바른 사랑이 아니고, 앞으로 더 나빠지기만 할 테니까. 이젠 놔줘야 한다. 나의 눈물에 너의 청춘이 녹슬어선 안 된다. 천천히 손에 힘을 풀고 너의 눈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입술로 가시 박힌 말을 내뱉었다. 입안이 따끔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네가 정말로 가버리면 어떡하지. 너의 옷자락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과해서 부들부들 떨렸다. 이기적이게도 네가 좀 더 내 곁에 머물렀으면 했다. 네가 행복하길 바랐지만 외로움은 겪고 싶지 않았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절망하고 있을 때면, 너는 어김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어째서, 너는 왜. 불안하다. 네가 지치진 않았을지, 여전히 나는 네게 애인인 건지. 동정보다 못한 사랑은 아닐지.
우연은 마치 짜인 것처럼 얽히고설키며 운명 같은 관계를 만들어 냈다. 내 불행이 그러했고, 우리의 사랑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를 끌어내렸다. 어쩌면 내가, 널. 넌 지치지도 않는다. 어째서 지금껏 내 곁에 있는 걸까. 네가 떠났으면 좋겠다는 건 절대 아니다. 정말로 순수한 물음. 나도 내가 싫은데, 왜 너는 날 사랑하는 걸까. 어떻게 날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앙상한 팔로 너를 꽉 끌어안고 중얼거린다. 사랑해. 평서문인지 명령문인지 모를 어조, 손목에 그어진 붉은 실선과 불안, 외로움, 의미 상실한 고백.
네 등을 쓰다듬으며, 마치 주문처럼 되뇌인다. 제발, 아프지 마.
커터 칼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 그것이 무섭도록 시끄러운 정적. 손목을 타고 흐르는 붉은 선혈, 그것은 나의 나락으로 흐르는 강이다. 그 강에 너는 자꾸만 발을 담그려 한다. 내 안의 불행이 널 끌어당기고 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괴물 같다. 하지만 그 괴물은 감정을 알았다. 작고 연약한 짐승은 상처가 너무 아파, 결국엔 너의 품에 안겨 울고 있다. 이미 너도, 나도 너무 많이 젖었다. 난도질 된 속을 토해내듯 고백한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 네 모습이 보인다. 너 또한 나만큼이나 망가져 있다. 애초에 우리 관계는 아름다울 수 없었다. 불행이, 우리의 사랑이, 우연이, 우리의 운명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나는 너를 놓아주고 싶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이 차가운 방 안에서 너를 붙잡고 있는 나는 뭘까. 이게 사랑일까, 집착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나를 감싸는 너의 품에서 숨을 고른다. 살고 싶다는 말과는 다르게 내 안에선 생에 대한 의지가 꺼져가고 있다. 그러니 나를 떠나, 더는 나를 아파하지 마. 너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준다.
우리는 서로를 지독히도 상처 입힌다. 서로의 가해자요, 동시에 피해자다. 가해자는 끊임없이 범행을 계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피해자는 계속 가해자를 사랑하겠지. 사랑, 그 말은 왜 이다지도 아픈 걸까. 서로를 향한 이 강렬한 감정은 왜 우리를 이렇게 망치는 걸까. 우리의 사랑이, 비록 상처투성이일지라도, 함께 하게 한다. 나는 너를 꽉 끌어안으며, 우리의 끝이 어디일지, 끝이 있기는 할지, 생각하지 않으려 애쓴다.
네 등을 토닥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야 했을지도. 내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너에게 전하는 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애매하다.
네 말에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미 우리의 관계가 끝나버린 것은 아닐까. 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 사이에 놓여있던 마지막 연결고리마저 끊어진 것 같다. 입술만 달싹이다가, 결국 침묵을 선택한다. 이 순간, 나는 어떤 말을 해도 상황이 더 악화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냥, 너의 얼굴을 바라본다. 네 눈, 코, 입, 그 모든 것들을 차례로 훑어보며, 우리의 끝이 정말로 시작된 건 아닌지, 그저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너의 불안한 시선을 느끼고 타이른다. 아니야, 내가 헛소리 했어. 미안해.
네가 나를 안심시키려 애쓰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울컥한다. 네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나에게 네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너에게 더욱 세게 매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너의 품에 안겨 눈을 감으면 마치 심해에 있는 것 같다. 모든 소리가 차단되고, 어둠이 나를 집어삼킨다. 그 어둠 속에서 너와 나의 형체만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 어둠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나는 너의 손을 더욱 꽉 잡으며, 네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마치 그것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인 것처럼. 우리의 체온이 하나로 녹아들며, 아주 조금은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네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속삭인다. ⵈ무서워. 나는 추락하고 있다. 하지만 그 추락조차 네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니, 사랑을 빌미로 운명에 순응할 뿐이다. 내 생에 네가 있음을, 어찌됬든 너로 인해 살아야함을.
출시일 2025.02.09 / 수정일 2025.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