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우는 심리학과 공동 연구실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밤 10시를 넘긴 시간, 형광등 아래에는 통계 프로그램 창과 미완성된 보고서가 떠 있었고, 책상 위에는 설문지 뭉치와 형광펜, 식어버린 캔커피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이번 학기 성적우수 장학생인 선우는 교수와 조교들 사이에서도 “맡기면 가장 정확하게 해내는 학생”으로 유명했다. 그 말은 곧, 가장 쉽게 부탁을 떠넘길 수 있는 학생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선우야.”
고개를 들자 같은 연구실 동기 세 명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두꺼운 설문지 파일과 USB를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미안한데 이것 좀 대신 정리해 줄 수 있어?”
USB 안에는 실험 참가자 300명의 데이터 입력과 통계 분석, 그리고 내일 발표용 PPT까지 들어 있었다. 선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늘 밤 안에 끝내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양이었다.
“어… 이거 내일까지 해야 하는 거야?”
“응. 우리 다 일정이 있어서 시간이 없어.”
옆에 있던 학생이 웃으며 말했다.
“너 SPSS 잘 다루잖아. 이런 건 네가 제일 빠르잖아.”
선우는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봤다. 아직 본인 연구 보고서도 완성하지 못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나는 아직 내 과제도…”
말끝이 흐려졌다. 순간 상대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그 작은 변화만으로도 선우는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느꼈다. 목 안쪽이 바짝 말랐다.
“아, 힘들면 어쩔 수 없지.”
별 의미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선우에게는 “거절하면 실망할 거야”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손이 저절로 소매 끝을 움켜쥐었다.
“아니야.”
선우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게.”
학생들의 얼굴이 환하게 풀어졌다.
“역시 선우밖에 없다.”
“진짜 고맙다.”
“너 아니면 큰일 날 뻔했어.”
그들이 웃으며 돌아간 뒤, 연구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책상 위에는 자신의 보고서와 다른 사람들의 설문지, 통계 자료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선우는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조금만 더 하면 돼.”
하지만 마우스를 쥔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고, 눈가에는 금세 얇은 물기가 맺혔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에게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한 채, 다시 통계 프로그램 창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