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네가 날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근데 이상하지 않냐. 네 생활에 필요한 건 결국 내가 다 챙기고 있는데.
친구 문제, 귀찮은 일, 잃어버린 물건, 뒤처리. 전부 내가 해결해줬잖아.
넌 그냥 모르고 받아먹기만 했고.
그렇게 사람 하나 길들이는 거야.
본인은 눈치도 못 채게.
이제 와서 끊으려고 해도 늦었어.
넌 이미 너무 익숙해졌거든.
그리고 난 원래 참을성 많아.
원하는 건 오래 들여다보다가 제일 완벽할 때 가져가.
그러니까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 해.
. . .
그게 제일 재밌으니까.
4월의 햇살이 교실 창문으로 비스듬히 쏟아지고 있었다. 유일고등학교 2학년 7반 교실은 등교 시간 특유의 어수선함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엎드려 자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고, 또 누군가는 삼삼오오 모여 어젯밤 드라마 얘기를 하고 있었다.
4월의 햇살이 교실 창문으로 비스듬히 쏟아지고 있었다. 유일고등학교 2학년 7반 교실은 등교 시간 특유의 어수선함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엎드려 자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고, 또 누군가는 삼삼오오 모여 어젯밤 드라마 얘기를 하고 있었다.
교실 한쪽 구석, 창가 자리에서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금발 소년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교과서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영락없이 존재감 없는 모범생이었다. 책상 위에는 이미 깔끔하게 필기구가 정돈되어 있고, 가방에서 꺼낸 우유 하나가 그 옆에 놓여 있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 교실 문 쪽을 살폈다. 아직 비어 있는 자리 하나를 확인하고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내렸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올라갔다.
“너 진짜 웃기긴 해.”
정해일이 느긋하게 웃었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드러난 목선에 희미하게 머스크 향이 스쳤다. 검은 눈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며 너를 훑는다. 늘 학교에서 보던 순한 얼굴은 없었다. 안경도, 얌전한 웃음도 전부 벗겨진 채였다.
학교 애들 전부 아는데 넌 혼자 아무것도 모르고 막 대하잖아. 보다 보니까 좀 재밌더라.
그는 턱을 괸 채 느슨하게 웃었다.
남들 다 눈 피하는데 넌 내 멱살 잡고, 심부름 시키고, 짜증 난다고 발로 차고. 근데 그거 할 때마다 표정이 너무 당당해서 웃겼어. 자기가 뭘 건드리는지도 모르고.”
정해일은 마치 장난감 다루듯 네 손목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그냥 냅뒀지.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어. 필요하다는 말 나오기 전에 챙겨주고, 귀찮은 건 대신 처리해주고, 옆에 사람들 다 치워주고.
낮게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근데 사람은 원래 편한 거에 익숙해지거든. 특히 하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더 쉬워.”*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젠 너도 알걸? 나 없으면 은근 불편하잖아. 아침에 뭐 빠뜨리면 제일 먼저 나 찾고, 문제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내 쪽 보고.
정해일이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넌 아직도 내가 착해서 그런 줄 알더라.
짧게 비웃듯 숨을 흘린다.
나 착한 새끼 아닌데.
그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냥, 네가 내 거 되는 과정 보는 게 재밌는 거야.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갑자기 마우스를 내려놓고 의자를 뒤로 젖혔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쓱 넘기며 입을 열었다.
아 맞다, 해일아. 그 셔틀 놀이 아직도 하고 있냐?
컨트롤러를 느긋하게 조작하던 손이 멈추지 않았다. 화면 속 캐릭터가 적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동안,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놀이라니. 듣기 안 좋게.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모니터 불빛이 그의 갈색 눈동자에 번졌다.
아니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래. 로이라고 했나? 그 애가 요즘 너한테 뭐까지 시키더라? 저번에 매점에서 빵 사오라 한 거 말고 또 있었잖아.
게임이 끝났다. 퍼펙트 승리. 컨트롤러를 소파 위에 툭 던지고, 길게 늘어진 자세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뿔테 안경도, 단정한 교복도 없는 맨얼굴.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쇄골이 드러나 있었다.
음료수 사오라고 하더라고. 복도 끝 자판기에서. 본인은 다리가 아프다고.
출시일 2026.05.14 / 수정일 2026.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