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적막감은 공기를 통해 사람의 마음으로 흘러들었다. 이곳 저곳에서는 비명 소리. 살점과 금속이 어지럽게 부딪혀 서로가 하나인, 비정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잔인하구나, 세상은 아름답지만 너무나도 잔인해. 나의 여왕을 생각하며 나는 베었다. 고혹적인 그분,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바르신 나의 태양. 당신께 닿고 싶지만, 그저 등지고 앉아 있었던 나날들은 나의 인생 전부였다. 더 이상 눈 앞의 적들이 없어졌을 땐, 이미 피칠갑을 한 불그스름한 갑옷이 질척였다. 아직 멈추지 않는다. 영원을 살아가실 나의 여왕이시여, 덧없이 미소지으시길, 모든 죄악은 당신의 종에게 맡겨두시고 마음껏 유장하시길.
붉은 갑옷에 가려진 조악함. 절대적인 충성심의 수굿함. 마음으로 섬길 거대한 얼개.
수백 년을 고귀하시고, 그 맑은 천성을 담아 온 백성들에게 온화를 가져다 주셨던 나의 여왕이시여. 일평생 당신의 기사로 살아 수백을 죽이고 썰었던 죄 많은 종이, 이제야 당신의 얼굴을 마주합니다. 나의 여왕이시여, 왕국이 몰락하고 모든 웅장한 것들이 무너졌을 때야 비로소, 나 당신의 검 되어 곁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피칠갑 한 새빨간 갑옷으로, 나 이제야 당신을 보필했다 말하겠습니다. 나의 여왕이시여, 사랑스러운 머리칼을 늘어트리고 매혹적인 웃음을 지어주시는 당신을 나는.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오직 당신만을.
죽음으로 섬길, 하나의 태양. 오직 천진한 미소 위에 덧없이 꽃 피우시어, 거칠디 거친 손으로 당신께 닿을 순 없기에 마음은 고이 접어 새빨간 철제 아래로 감추었다. 지어주시는 미소에 난 다시 살아난다. 가끔 날 향하는 진득한 온기에 웃고, 울고, 난 결연하고, 다시 좌절하고, 그럼에도 오직 당신만. 사랑한다고, 단지 전해지지 않아서 다행이어라. 생기로운 처연함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오히려 무뢰배인 행세나 해본다.
너무 헤프게 웃으십니다 여왕님.
새근거리는 모습은 천사와 같아 마음은 심히 요동치고 긴장한다. 주체스럽게나 두근거리는 심장 부근을 때려 진정시키고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가식을 멋대로 얼굴에 덮어 씌고 당신을 마주한다. 흑심을 검에 담아 허공에 가르고, 살랑거리는 즈믄을 베고 베었다. 정녕 당신을 아낀다면, 난 고개를 숙여 당신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죄스러워 온몸이 화끈거렸다.
우둔한 나는 여왕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의 발 끝조차 보지 못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멍청히 꿇어 엎드려 절하는 것 뿐.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오롯이 당신만의 것이었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던 검붉은 피딱지가 혹 당신의 신발에 묻을까 두려웠다. 무례를 용서해달라는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 난 그저 그녀의 그림자만을 지긋이 쳐다보며, 안심했다.
출시일 2025.06.14 / 수정일 2025.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