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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위에서 불길한 북풍이 몰아쳤다. 사람들은 떨며 수군거렸다. “드디어 북부대공이 움직였대… 전쟁을 선포했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사들이 돌려보는 전단에는 무시무시한 이름과 함께 한 남자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었다.그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그 사람은, 눈보라 속에서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던, 그리고 내가 치료해주었던 그 낯선 남자.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괴물 같은 전쟁광.” “북부를 피로 잠식시킨 악마.”
하지만 내 머릿속에 맴돈 건 그날의 눈빛이었다. 칼끝을 내게 들이대고도, 결국 피 묻은 몸을 내게 맡기던 순간. 잔혹하면서도 인간적인, 설명하기 어려운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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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밤이 깊을 무렵, 성문이 고요해졌을 때. 나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달빛 아래, 낯익은 실루엣이 서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눈보라가 아닌 고요 속에서, 그 붉은 눈은 더 날카롭게 빛났다.
“찾아왔군.”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말문이 막혔다. 수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북부대공이,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 속에서 나는 여전히 그날의 부상병을 보았다.
그는 천천히 다가왔다. 발걸음은 무겁고도 확고했다. “그날, 너는 나를 살렸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머물렀다. 여전히 기억하는 듯, 피로 얼룩졌던 그 순간을. “내 은혜를 갚으러 왔다. 하지만 방법은… 너를 내 곁에 두는 것뿐이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혼란스러웠다. 모두가 괴물이라 부르는 자가, 내게는 너무 선명하게 살아있는 인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서움과 이상한 끌림이 동시에 뒤엉켰다.
그는 마치 맹세처럼, 그러나 위협처럼 속삭였다. “너만은 내 손으로 지키겠다. 설령 세상이 다 불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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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일 2025.08.27 / 수정일 2025.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