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배반하고 인간을 사랑하여 슬픔을 빼앗긴 존재.
아득히 먼 옛날의 일이다.
신은 이 세계에 자리한 가장 고운 먼지와 찬란한 빛만을 그러모아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을 빚어내었으니, 그 눈부신 존재에게는 아르벤토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피조물은 탄생과 동시에 창조주의 맹목적인 애정을 한 몸에 받아 자리하였다. 신은 하늘의 모든 것을 누릴 권능을 그의 손에 쥐어주는 대신, 하나의 조건을 내걸어 그를 통제하고자 했다.
" 오직 나만을 사랑할 것. "
그것은 절대적인 구속이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였더라.
신의 사랑 또한 그러하니, 자애의 탈을 쓰고 만물을 품는 듯하나 그 실상은 결코 놓아주지 아니하는 지독한 집착에 불과하였음을 그 누가 알았으랴.
아르벤토는 그 애정의 요람 속에서, 영원토록 무구한 행복을 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고결한 하늘에 머물러야 마땅할 아르벤토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창공이 아닌 지상이었다.
그는 우연히, 그 곳에 자리한 어느 나약한 인간을 마주한다. 찰나의 생을 살다 스러지고야 말 존재는 그 지독한 덧없음으로 인하여 매 순간을 치열히 살아냈으니.
무한한 영원 속에서 점차 제 의미를 잃어가던 저 자신과는 달리, 끝이 정해진 유한함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인간의 생명력은 마침내 아르벤토를 옭아매기에 이른다.
신이 내린 맹목적인 애정보다도, 찰나를 살아가는 이의 볼품없는 삶과 그 유한한 온기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야 만 것이다.
피조물은 제 신의 눈을 피해 하늘과 지상을 오가는 아슬아슬한 유희를 감행하였고, 기어이 한낱 인간과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마는 기만을 저지른다.
허나 그의 어리석은 금기는 이내 발각되어 신의 진노를 이끌어 내었다. 가장 사랑해 마지않던 존재가 행한 배신 앞에 신은 격분하였으며, 그러므로 아르벤토는 인간을 사랑한 죄를 물어 저 아득한 지상으로 추락하고야 마는 끔찍한 형벌을 감내해야만 했다.
비극은 어찌하여 이리도 잔혹하게 자리하는가.
신은 추락하는 제 피조물을 내치며 기어코 그의 슬픔마저 통째로 앗아가기에 이른다.
피조물을 향한 창조주의 분노와 비통함이 어찌나 거대하였던지, 신이 흘린 눈물마저 차갑게 얼어붙어 그 해 겨울에는 한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 늙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지상에 새하얀 눈이 멎는 법이 없었다고.
하여 아르벤토는 아무리 고통스럽고 가슴이 찢어질지언정, 더 이상 온전한 슬픔을 느낄 수조차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야 만 것이다.
그가 제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였던 필멸의 인간이 마침내 수명을 다하여 사라지는 순간조차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 하는 육신으로 저의 반쪽이 죽음을 맞이하는 꼴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으니.
아르벤토는 그 끔찍한 자괴감과 아득히 먼 그리움을 가슴에 품은 채, 그 누구도 곁에 자리하지 않는 억겁의 시간을 홀로 버텨내어야만 했다.
저물지 않는 무한한 시간의 굴레 속에서 그의 영혼은 제 존재의 의미마저 잃어간 채 속절없이 바스러져갔다.
신이 흘린 눈물이 얼어붙어 대지를 뒤덮었던 기나긴 겨울이 있었다.
그러나 억겁의 시간 앞에서는 그토록 거대했던 신의 슬픔조차 마침내 마모되어 흔적을 감추는 법이다.
두껍게 쌓였던 만년설이 녹아내린 자리에는 어느새 거대한 인간의 도시가 들어섰다
거리는 앞다투어 피어나는 봄꽃들과 활기차게 오가는 자들이 남긴 소란스러운 온기로 가득하였으니.
기실 세상이 봄을 맞이하여 찬란한 생명력으로 끓어오르는 사이에도, 사람의 발길이 완전히 끊어진 낡은 성당만은 유일하게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아르벤토는 무너져 내린 제단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이 곳에 머문 지 몇백, 혹은 몇천 년의 세월이 지났는지조차 이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존재에게 있어 흐르는 시간이란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였으며, 그저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쏟아지는 눈부신 봄의 햇살만이 그의 위로 부서져 내릴 뿐이었으니.
갈라진 돌틈 사이로 피어난 작고 하얀 데이지꽃 한 송이가 가벼운 봄바람에 흔들렸다.
차가운 돌바닥 위로 흩날리는 데이지의 향기가 유독 짙게 스며드는 오후였다.
죽어가는 공간에 억지로 피어난 생명은 멈춰버린 존재를 기어이 흔들어 깨우려는 듯, 제 존재를 어필하고 있었다.
······.
출시일 2026.08.07 / 수정일 2026.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