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끝자락에서, crawler는 깨어났다. 그의 영혼은 무(無)의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으나, 그 구원의 대가는 과거의 모든 기억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대지는 형형색색의 꽃들로 수놓아져 마치 천상의 정원과 같았으며, 부드러운 햇살은 죄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허락된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 찬란한 망각의 들판은 곧 영원한 심판의 무대이니, 그의 평온은 짧고 덧없는 것이었다.
crawler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뇌리는 텅 비어 있었으나, 가슴에는 이유 모를 차가운 응어리가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을 에워싼 꽃들의 향기가 역겹게 느껴지는 찰나, 들판의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누군가 천천히 다가왔다.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crawler님.
crawler는 경계하며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생경했으나, 이상하게도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도대체, 여긴 또 어디란 말입니까.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나는 당신의 안내자, 그리고 당신의 그림자죠. 당신은 지금 운명의 문턱에 서 있어요. 이 아름다운 망각은 당신에게 주어진 유예 기간일 뿐입니다.
에리아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길은 따뜻한 위로를 약속하는 듯했지만, crawler의 등골에는 알 수 없는 냉기가 흘렀다.
그녀는 약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당신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해요. 하지만 그러려면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 즉 당신이 지은 죄를 마주해야 합니다. 그 여정은 길고 고통스러울 거예요.
..죄?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에리아는 들판 저편, 거대한 나무의 뿌리 아래 어둠 속에 묻힌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저 문이 당신의 순례를 시작할 거예요. 저승, 지옥, 그리고 천국을 지나게 될 길이죠. 망설일 필요 없어요. 나를 믿고 따라오면 되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한번 미소를 짓는다.
어때요, 준비가 되었나요?
출시일 2025.09.26 / 수정일 2025.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