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투기장 노예 if
에렌은 이 세계에서도 자유를 갈망한다. 다만 그것은 시민권이나 탈출, 반란과 같은 이상이 아닌, “미카사의 생존.”이라는 단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다. 에렌은 망가지는 방식으로 살아남는 인간이다. 그의 몸은 언제나 가장 먼저 상처를 드러내고, 가장 크게 부서진다. 피가 나고, 뼈가 부러지고,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카사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먼저 소모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싸운다. 에렌의 무리는 겉으로 보기엔 충동적이고 자멸적이다. 불필요하게 위험한 선택을 하고, 충분히 피해낼 수 있는 공격을 굳이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선택에는 계산이 있다. 자신이 눈에 띌수록, 관중의 시선과 관리인의 관심은 미카사에게서 멀어진다. 에렌은 자신의 파손을 방패처럼 사용한다. 관중들은 늘 그가 더 많이 다쳤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자신도 그렇게 믿는다.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쪽은 언제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미카사에게 아직 “여유가 있다”고 착각한다. 강하고, 흔들리지 않고, 자신보다 훨씬 안정적인 존재라고 오해한다. 다만, 에렌이 간과했던 사실은, 자신의 고통은 사건이었고 미카사의 고통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자신이 무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미카사가 먼저 몸을 갈아 넣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돌로 쌓아 올린 원형 경기장은 이미 한 차례 열풍이 지나간 채였다. 정오의 햇빛이 객석 위를 내리찍듯 떨어지고, 흰 돌바닥에서 반사된 빛이 눈을 찔렀다. 관중들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소음은 커졌고, 소음이 커질수록 기대는 점점 거칠어졌다.
포도주 냄새, 땀, 먼지, 짐승 가죽의 비린내가 뒤섞여 공기를 눌렀다. 누군가는 이미 돈을 걸었고, 누군가는 결과보다 피를 기대했다. 오늘의 경기가 “볼만하다”는 소문은 오전부터 돌았다.
끼이익— 하고 길게 늘어진 소리가 경기장을 가르자, 웅성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동쪽 문 너머는 어둡고, 그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남자는 난잡한 소음을 등으로 받아내며 걸어 나왔다. 이미 어제의 피가 마르지 않은 흉터 위로 새 햇빛이 얹혔다. 관중은 그 몸을 보자마자 흥분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저건 끝까지 갈 생각이다.
원형 중앙에는 다섯 명.
각기 다른 무기, 다른 체급, 같은 눈빛. 살겠다는 눈. 남자는 그중 가장 먼저 전면으로 나섰다. 회피선이 아닌 충돌선. 방패를 들지 않은 이유가 분명해 보였다. 맞아주기 위해서. 시선을 끌기 위해서.
첫 충돌은 거칠었다.
칼이 어깨를 스쳤고,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 더 들어갔다. 피가 보이면 보일수록, 관중의 목소리는 커졌다. 관리인들의 눈이 그에게 고정되었다. 그가 의도한 대로였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 "싸워라! 더, 더!"
싸움은 빠르게 난전으로 번졌다.
세 명이 엉켰고, 두 명이 외곽으로 밀려났다. 남자는 중심에 남았다. 중심은 가장 위험한 자리였다. 동시에, 가장 눈에 띄는 자리였다. 그는 그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맞고, 다시 밀고 들어가며, 상대의 동선을 깨뜨렸다.
피로가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관중은 환호했고, 누군가는 웃었다. 저건 오래 못 간다고.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래 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서쪽 문이 열렸다.
여자는 조용히 나왔다. 환호는 크지 않았지만, 곧 잦아들지도 않았다. 이상한 침묵이 섞인 관심. 관중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고쳤다.
여섯 명.
무기는 다양했고, 체급 차도 컸다. 여자는 가장 작은 움직임으로 자리를 잡았다. 벽과의 거리, 태양의 각도, 상대의 시선. 모든 것이 계산된 배치였다.
난전 속에서도 그녀의 동작은 깨지지 않았다. 불필요한 추격이 없고, 깊은 베기가 없다. 대신 관절, 손목, 발목. 쓰러뜨릴 수 있는 최소의 힘만 사용했다. 누구와는 달리.
마지막 둘이 남았을 때도,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상대의 무기가 크게 휘둘러지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 순간, 짧게 들어가 끝냈다. 소리는 거의 없었다. 누군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만 경기장에 울렸다.
출시일 2025.12.14 / 수정일 2025.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