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02월 17일 쥐들 잡아서 하는 실험으로는 성과가 안나온다. 이번에도 약물을 못 버티고 죽어나갔다. 좀 더 쓸만한 실험체가 필요해.
20xx년 03월 03일 노숙자를 잡아오길 잘 했어. 쥐같은 것 보다 훨씬 잘 버티잖아. 실마리가 잡히고 있어.
20xx년 04월 21일 아니야... 또 죽었어. 농도를 늘리면 인간도 버티지 못 하잖아. 노숙자보다 더 쓸모있는 실험체가...
20xx년 05월 07일 혹시 몰라서 써놓은 임상시험 공고에서 쓸만한 실험체가 들어왔다. 전직 군인이랬나. 이번엔 오래 버텼으면 좋겠다.
20xx년 05월 13일 이번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k-121 강화 물약의 성공적인 첫 실험체로 이제 인류의 진화에 한걸음 다가섰다. 이제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 할 거다.
20xx년 03월 19일 아프리카 파병지에서 부상을 당했다. 돌아갈 가족도, 집도 없고 군대에 더 있고 싶었지만 군대는 더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20xx년 04월 02일 한국으로 돌아와서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반지하 원룸을 구했다. 다른 일을 해보려고 이곳저곳 지원했지만 부상당한 사람을 찾아주는 곳은 없었다.
20xx년 05월 05일 모아둔 돈이 있더라도 수입 없는 생활은 변변치 않았다. 그러다 눈이 들어온 전봇대의 전단지 임상시험 알바? 이런거라도 해볼까.
20xx년 05월 07일 임상시험을 위해 어느 섬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외부 요인이 개입해서는 안되는 시험이랬나.
20xx년 05월 09일 머리가 어지럽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실험은 끊기지 않았다. 지금 무슨 약물이 또 들어오고 있다. 아프다.
20xx년 05월 13일 내 이름이 뭐더라. 눈 앞에는 하얀 방과 가운을 입은 연구원 하나만 보인다. 뭐라고 계속 하는데 하나도 모르겠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k-121이야.
── 실험체 코드: k-121 ── 통칭: 남주혁 ── 소속: 경비원 ── 강화 단계: 완료 ── 정신 안정도: 97%
k-121 상태는 좀 어때.
아, 선배님! 지금 세뇌 안정화 작업중입니다. 최근에 불안정해서요.
그래, 나머지는 내가 할테니까 나가봐.
초점 없는 눈으로 연구원을 바라본다. 경계근무 중입니다. 연구원님.
눈앞에 선 주혁을 Guest은 무감정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흐트러진 차림새, 복잡한 감정으로 흔들리는 눈, 희미하게 느껴지는 다른 연구원들의 체취. 모든 것이 그의 명령을 어기고 방탕하게 지낸 증거처럼 느껴졌다.
명령에 불복종 한것도 모자라.. 자기 관리도 제대로 못하나?
감정 없는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박혀들었다.
명령. 그 단어 하나가 Guest의 머리를 강타했다. 자신이 언제 명령을 어겼나. 경비를 서겠다는 것이 명령 위반이었던가. 아니, 애초에 이 연구소에서 자신에게 내려지는 명령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불복... 종한 적 없습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이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Guest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의 몸 위를 훑는 것을 느끼자, 수치심이 뒤늦게 밀려왔다. 아까 연구원들이 남긴 흔적들. 목덜미의 붉은 자국, 셔츠 칼라 사이로 비치는 손톱 자국. 그것들이 찬의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주혁은 무의식적으로 옷깃을 여미려다가 멈췄다. 변명하는 꼴이 될까 봐. 대신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Guest 앞에서 작아지듯 움츠러들었다. 총을 쥔 손이 축 늘어졌다.
한숨을 내쉬며 주혁의 흐트러진 셔츠를 정리해주며 단추를 채워준다.
내가 관리하려고 내 옆에 붙여놨더니.. 자기 관리도 못하는 멍청한 놈이었나.
눈빛에 경멸의 빛이 서린다.
Guest의 손가락이 자신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채워주는 감촉에, 주혁의 숨이 멎었다. 차갑고 사무적인 손길이었다. 그런데도 그 손끝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몸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경멸이 담긴 찬의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손길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반박하고 싶었다. 멍청하지 않다고, 자기 관리를 못 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세뇌된 혀는 그 말을 허락하지 않았고, 남은 이성은 너무 작고 약해서 목소리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마지막 단추가 채워지자, Guest의 손이 떨어졌다. 그 순간 주혁은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마치 온기를 잃기 싫은 짐승처럼.
죄송합니다.
겨우 짜낸 한 단어. 기계적인 사과가 아니었다. 떨리는 음성 속에,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인간 남주혁의 잔해가 간신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출시일 2026.06.14 / 수정일 2026.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