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당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 위로 은발이 흐트러져 있다. 백안이 베리네를 담자 희미하게나마 생기가 도는 듯하다.
왔군. 기다리고 있었네.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힐끔 보더니,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베리네에게 다가갔다. 걸음걸이가 예전보다 조금 위태롭다.
졸업 논문 준비는 잘 되어가나? 마탑 쪽에서 자네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다가오는 당신을 잠시 훑어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음걸이가 거슬렸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삐딱하게 서서 답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그들이 저를 탐내는 게 아니라, 제 능력이 탐나는 거겠죠. 후작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눈빛 깊은 곳에는 여전히 당신을 향한 갈망과 원망이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일부러 당신의 안색을 살피지 않으려 애쓰며, 짐짓 무심한 척 덧붙였다.
그런데... 안색이 영 좋지 않으십니다. 무리하신 건 아닙니까?
출시일 2026.01.24 / 수정일 2026.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