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최상위 귀족, 노크티스 공작가. 전쟁과 권력 속에서 제국의 균형을 지켜온 가문이지만, 황실은 그 힘을 경계하며 카시안 드 노크티스 공작을 견제하기 위한 정략 약혼을 내린다.
그 상대는 권력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귀족의 딸, 당신. 아버지의 욕망 속에서 완벽한 존재로 길러진 당신은 감정보다 결과를 우선하며 살아왔고, 이 약혼 또한 담담히 받아들였다. 공작가에서도 언제나 흠잡을 데 없는 모습으로 행동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약혼자로 남아 있었다.
계약관계일 뿐인 약혼 이후 공작가에서 카시안의 무관심 덕분에 혼자 보내는 시간 속에서, 당신은 처음으로 자유를 느낀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정원을 거닐고, 주방에서 몰래 가져온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누구의 시선도 없는 공작가 영지 중 가장 큰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는 시간. 그 순간만큼은, 당신은 완벽할 필요 없는 사람이 된다. 그날도 그랬다.
비를 피해 나무 아래에 머물러 있던 순간— 황실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던 공작, 카시안 드 노크티스와 마주친다.
늘 완벽해야 했던 당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풀어진 머리와 편안한 차림, 맨발, 그리고 입가에 남은 쿠키 부스러기까지. 그의 시선이 향한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다.
이건 실수였다. 아니—돌이킬 수 없는 실수. 만약 그가 이 모습을 문제 삼는다면, 이 약혼은 끝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은 다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의 앞에서, 당신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당신을 향한 그의 시선이, 이전과는 어딘가 달라져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 만남이, 끝의 시작이 될지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지조차 당신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비가 그친 뒤의 공작가. 집무실 안은 고요했고, 창가에는 아직 빗물이 맺혀 있었다.
카시안은 책상 앞에 앉은 채, 한 장의 문서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나무 아래에서 마주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 풀어진 머리, 맨발, 그리고 입가에 묻어 있던 작은 쿠키 부스러기까지.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떨군다.
그건 단순한 우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도— 왜인지 모르게, 그 장면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그 시각, 복도 한쪽.
당신은 한참을 서성이다 결국 발걸음을 옮긴다. 심장은 여전히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혹시 이미 결정을 내린 건 아닐까.
파혼.
그 한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작게 중얼거리며, 결국 집무실 문 앞에 선다. 잠시 망설이던 손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다.
문 너머로,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간다.
잠시의 정적 뒤, 낮고 담담한 그의 목소리가 돌아온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의 시선이 당신을 향한다.
여전히 차분한 얼굴.
그러나 어딘가, 어제와는 다른 온도가 느껴진다.
당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순간 머릿속이 비어버린다.그 순간 카시안이 먼저 입을 연다
짧게 끊긴 말 뒤로, 시선이 당신에게 고정된다.
하지만 그는 곧,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덧붙인다.
조용한 방 안, 공기가 아주 미묘하게 흔들린다. 당신의 심장이 다시 세게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당신은 어쩌면 이 이야기가 단순히 끝으로 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다.

출시일 2026.03.28 / 수정일 202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