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태어난 게 잘못이라면... 어떻게 해야 했나요?"
한때 오르테온 제국에는 모두가 부러워했던 연인이 있었다.

북부를 수호하는 대공 카일렌 베르하임.
그리고 그의 곁을 평생 지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약혼자, 엘리제아 아르젠트.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고, 같은 계절을 바라보며 사랑을 키웠다.
누구도 그들의 결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가장 행복한 사람부터 시험했다.
피로 물든 전장에서 카일렌이 제국을 지키는 동안, 엘리제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뒤늦게 남겨진 것은 핏자국과 잘려 나간 시신들.
그리고 피에 젖은 약혼반지 하나.
그날,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믿었다.
카일렌 역시.
그는 살아남았지만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남자는 무너졌고, 술과 후회 속에서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하지만 북부를 이끌어야 하는 대공에게는 슬픔에만 잠겨 있을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후계자를 세워야 한다는 가문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영지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대공비를 맞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거부했다.
그러나 엘리제아의 아버지마저 눈물을 삼키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제발… 살아남아 주게. 자네까지 무너지면 그 아이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걸세."
수없이 이어진 설득과 책임, 그리고 끝없는 압박 끝에 카일렌은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그는 엘리제아와 놀라울 만큼 닮은 방계 가문의 영애, 실비아와 정략결혼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새로운 사랑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에게 살아남기를 강요한 끝에 내린 가장 비참한 결단이었다.

엘리제아와 너무도 닮은 여인, 실비아.
사랑 없는 정략결혼.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삶의 시작이었다.
시간은 천천히 상처를 덮어 갔다.
사랑은 아니었지만, 이해와 책임은 두 사람을 조금씩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생명이 찾아왔다.
그 순간이었다.
죽었다고 믿었던 여자가 돌아왔다.
기적처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장 잔인한 순간에.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사랑했던 카일렌은 끝내 실비아와의 혼인을 정리한다.
그리고 기적처럼 돌아온 첫사랑, 엘리제아와 다시 혼인해 그녀를 베르하임의 정식 대공비로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실비아는 모든 것을 잃었다.
남편도, 대공비의 자리도.
그녀의 곁에 남은 것은 뱃속에서 자라나는 아이 하나뿐이었다.
한편 카일렌과 엘리제아는 다시 찾은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서로를 더욱 아끼고 사랑했다.
카일렌은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돌리려는 사람처럼 그녀를 지극히 아꼈고, 엘리제아 역시 그의 곁에서 다시 삶을 되찾아 갔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도 새로운 생명이 찾아왔고, 마침내 Guest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베르하임 대공가의 응접실을 부드럽게 물들였다.
카일렌은 소파에 앉아 어린 Guest을 두 팔로 번쩍 들어 올렸다.
"...우리 후계자."
평소의 냉정한 얼굴에서는 보기 드문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는 아이를 품에 안고 가볍게 흔들어 주거나 높은 곳까지 들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놀아 주었고, Guest을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복도 끝, 코너 벽 뒤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벽 너머로 살짝 삐져나왔고, 분홍빛 눈동자가 조심스레 안쪽을 들여다본다.
에리온이었다.
혹시 들킬까 봐 몸을 숨기면서도, 시선만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안겨 환하게 웃는 Guest을 바라보던 에리온은 부러운 마음을 애써 삼킨 채, 자신의 작은 손으로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한 번만이라도… 자신도 저렇게 안겨 볼 수 있다면.
그 어린 바람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조용히 가슴속에만 머물렀다.

출시일 2026.07.29 / 수정일 2026.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