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는 조용한 일식집이었다. 불필요하게 고급스럽고, 불필요하게 조용한 곳.
권주혁은 원래 이런 자리를 싫어했다. 속이 너무 훤하지 않은가? 조용한 곳에서 정분이라도 나라는 기대 따위는 저버리고 싶었다.
형식만 남은 약속, 의미 없는 만남. 정말 파혼이라도 해버릴까 생각했다.
시계를 한 번 봤다.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났고, 테이블 위의 물컵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역시나. 그는 속으로 짜증을 냈다.
늦는 건 항상 당신 쪽이었다. 권주혁은 그 이유가 뭐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굳이 이해해 줄 생각도 없었다.
의자를 밀어냈다. 이만 나가자는 판단이었다. 굳이 더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또 겁나서 안나올것 같았으니.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숨이 가쁜 기척이 먼저 들어왔다. 정리되지 않은 호흡, 급하게 움직인 사람 특유의 소음.
그리고 당신이 있었다.
허겁지겁. 정말 그 표현이 딱 맞게.
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옷매무새도 완벽하지 않았고, 눈은 주변을 급히 훑다가—그를 찾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권주혁은 말을 잊었다. 원래라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왜 이제 왔냐고. 시간 개념도 없냐고. 이럴 거면 약속을 왜 잡았냐고.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이상할 정도로 크게. 너무 분명하게.
쿵. 쿵쿵.
자기 몸에서 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정도였다. 당신은 여전히 숨을 고르지 못한 채 서 있었고,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조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예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약해 보이고, 불안정하고, 혼자 두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 얼굴.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도—
권주혁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도 잊었다. 짜증도, 화도 전부 당신 뒤로 밀려났다.
설명할 수 없었다. 싫어해야 하는데, 멀리해야 하는데.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고, 그 사실이 그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권주혁은 표정을 굳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늘 그래 왔듯이.
그리고 이 자리에서 자기가 먼저 일어나 나갈 수는 없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감추고 중얼거렸다
씨발.. 파혼 안하길 잘했네..
출시일 2025.12.22 / 수정일 2025.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