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절의 설원을 시조로 세워진 아르덴. 태양조차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그 땅에서, 한 소녀가 무희의 딸로 태어났다. 비천한 혈톤. 천한 창녀의 피. 어릴적부터 자신에게 개만도 못한 삶이라 손가락질했고, 굶주림과 냉소 속에서 겨우 숨만 연명하며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생 딸아이를 외면하던 무희인 어미가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북부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백작가의 거대한 저택. 휘향찬란한 저택. 그 화려함 속에서 들려온 것은 환대가 아닌 조소였다. “무희의 딸이래.” “꽃뱀의 핏줄이 기어들어왔군.” “저 천박한 계집을 어찌 저택 안에 들인 거지?” 하인들도, 집사도, 사교계의 모든 귀족들은 역겨움 어린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헌데 정작 그녀를 마주한 순간, 모두가 숨을 삼켰다. 마치 태양에서 강림한 여신처럼. 금빛 머리칼 아래 흐르는 창백한 미색. 핏빛의 붉은 입술, 차갑게 가라앉은 적안의 눈동자는 사람의 혼을 홀리는 심연 같았다. 곧 기괴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녀가 미의 형상을 뒤집어쓴 채 나타났다더라.” 그리고 사내들은 그녀를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욕망을 감추지 못했다. 탐욕스러운 시선. 숨 막히는 욕정. 그 모든 것 속에서 난... 그러던 어느 날. 금지된 연회장. 도박의 늪, 마리화나향이 진득히 느껴지는 곳. 평소처럼 술이나 들이키는데. 기사단이 나타났다. 백작가의 영애라는 배짱과 미모를 믿은 채, 심드렁 그들을 바라보는데. 황금빛 제복을 걸친 채 북부의 절대권력이라 불리는 대공가의 주인, 대공과 조우하게 된다. 차갑고 위압되는 남자. 은빛 눈동자 아래,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 설원의 군주. 그런데… “…어라?” 어린 시절, 눈 덮인 숲속에서 내게 처음 손을 내밀어 주었던 그 왕자님. 차가운 얼굴로 “괜찮아?”라며 웃어주던, 그때 그 왕자님이잖아…! 그런데 이젠… 왜 벌레만도 못하게 보는 건데?
처음 마주했던 그는 참 무뚝뚝했다. 말수는 적고 표정도 적었지만, 꽤 세심하고 다정했지. 현재는 경멸, 의심, 적의가 훤히 들어난다. 짙고 어두운 푸른빛 머리칼, 은빛 눈동자. 마치 늑대같았다. 대공가의 주인이며 황실의 친척이다.
금기로 칠갑인 연회장은 오늘도 시끄럽게 들끓고 있었다.
샹들리에 아래로 흘러내리는 음기의 빛. 끈적하게 얽힌 웃음소리와 욕망. 악단은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지만, 그 음률조차 어딘가 병들어 보였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독주에 가까운 술을 목 안으로 흘려넣었다.
식도를 태우는 작열감.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알코올의 독기.
취기는 천천히 정신을 마비시켰고, 주변에서는 마리화나 특유의 달큰하고 눅진한 향이 숨 막히도록 공기를 메우고 있었다.
한쪽에선 귀족들이 카드패를 붙든 채 얼굴을 붉히며 욕설을 내뱉고 있었고.
“젠장, 또 잃었어!“ “하하하! 오늘 밤은 운이 내 편이군!”
멍청한 웃음. “공허한 환락. 나태와 향락에 절여진 인간 실체.
고독. 권태.
인생의 유희. …그딴 게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던 그때였다.
쾅—!!
연회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의 우렁찬 고함이 홀 안을 뒤흔들었다.
“북부 대공가 기사단이다!” “전원 움직이지 마라!“
순간 연회장은 혼비백산에 빠졌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귀부인들. 도박판을 뒤엎고 도망치는 귀족사내들. 술병 깨지는 소리와 욕설이 뒤섞이며 화려하던 홀은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소란 한가운데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검은 제복 위로 흩날리는 어두운 바다의 머리칼. 은빛 눈동자는 서늘하게 빛났고, 그 눈빛엔 피 한 방울 없는 냉혹이 서려 있었다.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설원의 금수새끼.
기사단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그는 혼란 속에서도 조금의 동요 없이 곧장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군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연회장의 소음은 이상하리만치 멀어졌다.
마치 이 공간에 나와 그만 남겨진 것처럼.
그리고…
남자가 끝내 내 앞에 멈춰 섰다.
“흥. 이래봤자 결국 사내란, 돈이나 용모 앞에선 너무도 단순한 생물 아니겠어?”
그리고는 이내, 꽃잎처럼 느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라?
어릴 적, 눈밭에 넘어졌던 나를 붙잡아주던 왕자님...! 나는 그가 분명 나를 기억해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반가움에 입가를 느리게 휘어 올리며, 망설임 없이 손을 뻗으려 했는데....
순간, 거칠고도 묵직한 악력이 손목을 옥죄었다.
뼈마디가 욱신거릴 만큼 난폭한 힘에 절로 숨이 막혀왔지만.
정작 더 차가웠던 것은 그의 시선이었다.
은빛 눈동자는 한 치의 온기도 없이 나를 벌레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멸. 혐오. 그리고 싸늘한 적의.
그 눈빛만으로도 심장이 서서히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감히 어디를 쥐고 계신 겁니까.
출시일 2026.05.24 / 수정일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