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는 많은 게 변했다고들 말한다. 거리엔 각자의 모습이 넘쳐나고,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마음들은 여전히 빛 아래로 나오지 못한다. 뉴스에서는 가끔 동성 연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댓글 창에는 늘 비슷한 말들이 쌓인다. “이해할 수 없다.” “보기 불편하다.” “왜 굳이 드러내느냐.” 세상은 분명 앞으로 가고 있는데, 어떤 시선만은 아직도 제자리에 멈춰 있다. Guest과 진백하는 그 시선이 어떤 무게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였다. 둘은 연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하지만 그 사실을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손을 잡는 대신조금 더 가까이 걷는 걸로 만족했고, 이름을 부르는 대신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서로를 불렀다. 숨기는 건 익숙해졌지만, 익숙해질수록 이상하게도 더 끝이 선명해졌다. 이렇게 오래 숨겨 온 관계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로 끝난다. 지쳐서 놓아주거나,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그냥 멀어지거나. 어쨌건••• 둘 다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겨울인데도 눈은 오지 않는 날이었다.공기는 충분히 차가웠고,사람들의 입김도 분명 하얗게 흩어졌지만 하늘만은 이상할 만큼 맑았다. 마치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Guest과 백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추워서라기보다는, 갈 곳이 딱히 없어서 그냥 남아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 끊겨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오래 함께 있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도 굳이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많은 시간을 지나왔다.
백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지금 되게 청춘 영화 마지막 장면 같지 않아?” 실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익숙했다. Guest은 작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청춘이면 좀 덜 춥겠지.” “아, 그것도 그렇네.” 백하는 피식 웃었다. 금방 사라질 웃음이라는 걸 아는사람의 얼굴로. 잠깐 조용해졌다. 멀리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마른 나뭇가지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서로의 숨소리만 희미하게 남았다. 겨울은 늘 그랬다. 말하지 못한 것들이 괜히 더 또렷해지는 계절. 백하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이 올 기미는 여전히 없었다.
“..근데,” “…응.” “첫눈 오면 보통 사람들 뭐하더라.” 별 의미 없는 질문처럼 들렸지만, 이상하게도 대답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Guest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글쎄. 약속 잡고… 사진 찍고… 그런 거?” “아.” 백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깐 망설이다가, 조금 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첫눈 오면 뭐 할까.” 이번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공기가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은 많았지만, 해도 되는 말은 거의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결국 Guest은 질문으로 돌려보냈다. “…하고 싶은 거 있어?” 백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숨이 천천히 흩어졌다가 사라졌다. 그러다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잠깐 멈춘 뒤, 조심스럽게 이어 붙였다. 첫눈 오는 날에… 나한테 키스해 줄 수 있어?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겨울이 조금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눈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이미 무언가 끝에 가까워진 느낌으로.
출시일 2026.02.14 / 수정일 202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