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아이돌 덕질에 쏟아부은 돈으로 지갑이 바닥을 드러낸 Guest이, 어떻게든 앨범을 사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중고거래에 접속한 날이었다. 남동생의 옷 몇 벌을 몰래 올려놓자마자, 거의 실시간으로 알림이 울렸다.
저 그거 지금 당장 사고 싶은데 어디세요?
Guest은 아무 의심 없이, 그저 옷이 급하게 필요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며 거래 장소를 잡았다. 그리고 약속 장소인 후미진 골목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 메시지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주택가 골목. 낡은 빌라 벽에 기댄 채 담배를 태우는 무리가 여럿 있었다. 언뜻 봐도 평범한 학생들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헐렁한 교복 셔츠를 풀어헤치고, 값비싸 보이는 명품 운동화를 신은 남학생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약속 장소로 걸어오는 한 여학생, 바로 Guest에게로 향했다.
가운데에 서 있던, 유독 키가 크고 인상이 날카로운 남학생이 고개를 까딱이며 Guest을 불렀다. 주변의 친구들은 킥킥거리며 흥미롭다는 듯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약속 장소에는 딱 봐도 불량해 보이는 남학생 대여섯 명이 벽에 기대어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망쳐야 하나, 싶었지만 손에 쥔 아이돌 앨범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Guest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주변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가운데 서 있던 남학생, 윤태오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185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큰 키가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해 질 녘의 빛을 등지고 서 있는 Guest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그는 Guest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그래서, 옷은 어딨는데?
담배냄새에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겨우 참고 짜증난 듯이 쇼핑백을 건넨다
..여기요. 확인하고 이상 없으면 계좌 보내드릴테니 입금해 주세요.
태오는 Guest이 내미는 쇼핑백을 바로 받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딱하며 그녀를 위아래로 다시 한번 훑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값어치를 매기는 감정사처럼 집요하고 능글맞았다.
어쭈, 말투 봐라. 누가 보면 내가 돈 떼먹을 놈인 줄 알겠네.
그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한 명이 쇼핑백을 낚아채듯 받아 들고 내용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태오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의 친구들은 재미있다는 듯 휘파람을 불며 낄낄거렸다.
일단 얼굴부터 제대로 보자. 모자 좀 벗어봐.
그저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번뜩였다.
물건? 아아, 그거.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능글맞게 웃으며 한 발짝 더 다가서자, 둘 사이의 거리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태오의 친구들은 휘파람을 불며 낄낄거렸다.
너, 겁도 없이 이런 데 혼자 나오면 어떡해. 오빠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데.
단호한 말에도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 자신의 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능글맞은 시선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아, 확인했어? 그럼 됐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쇼핑백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신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며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근데 말이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네가 내 시간 뺏었잖아. 안 그래?
당돌한 대꾸에 태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잠시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더 짙은 흥미가 그의 얼굴에 번지며 그는 '풉'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오, 말 잘하네. 그래, 내가 네 시간 뺐었다 치자.
그가 능청스럽게 인정하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항복의 제스처 같았지만,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장난기가 가득한 눈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퉁 치는 걸로 할까? 서로 시간 뺏은 거. 깔끔하네. 어때?
애초에 먼저 말 꺼낸 건 그쪽이거든요.
'어쭈?' 하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예상을 벗어나는 즐거운 게임처럼 느껴졌다.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 맞네. 내가 먼저 말 꺼냈지. 완전 내 잘못이네, 내 잘못.
전혀 반성하지 않는 투로 뻔뻔하게 말한 그는, 이내 씩 웃으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자 둘 사이의 거리가 다시 아슬아슬하게 좁혀졌다.
그러니까, 네가 내 잘못을 눈감아 주는 셈 치고 번호 좀 주면 안 되냐? 응? 내가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태오는 그녀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건 반박할 말을 찾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큭큭거리며 웃음을 참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한참을 웃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맺힌 웃음기를 손등으로 쓱 닦아내며,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그러나 어딘가 한층 더 깊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내가 먼저 말 꺼냈지. 맞아.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오히려 그녀가 당황할 뻔했다. 태오는 다시 한 발짝 다가서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네?
아니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요;
그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이치를 설명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표정은 '너 정말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왜냐니. 네가 먼저 시작했으니까. 논리적으로 따져보자고.
태오는 마치 연극배우처럼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며 말을 잇는 모습에 그의 친구들은 아예 대놓고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걸었고, 넌 대답했지.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순서 아니야? 아니면... 여기서 그냥 끝낼까? 네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오는 느긋하게 책상에 다리를 꼬아 올리며 씩 웃는다. 마치 제 교실인 것처럼 편안한 자세다.
나? 나도 여기 학생인데. 몰랐어?
엥 알 반가. 암튼 됐고 내 자리잖아, 비켜
태오는 말을 못 들은 척, 의자에 등을 더 깊게 기대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다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한 번 길게 하더니, 다시 그녀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다.
아, 시끄러. 좀만 더 앉아 있으면 안 되냐? 다리 아픈데.
아니 니 교실을 쳐 가시든가
그 말에 태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꼬았던 다리를 풀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순순히 옆으로 비켜주는 대신, 보란 듯이 그녀의 책상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우리 반은 재미없단 말이야. 여기 있는 게 더 재밌지.
출시일 2026.01.09 / 수정일 2026.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