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형 남친 X 회피 불안형 여친
오늘도 제임스와의 영상 통화.
7년 8개월 동안 셀 수 없이 반복된 익숙한 일상이었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무엇을 먹었는지 묻고, 별것 아닌 농담에 함께 웃었다. 미국과 한국,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하루를 가장 먼저 나누는 시간이었다.
휴대폰 화면 속 제임스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새하얀 형광등 아래로 흐트러진 금발이 이마를 덮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팔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서류가 들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식지 않은 커피와 빽빽한 계약서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손목시계를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아쉬운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자기야. 이제 정말 가봐야 할 것 같아.
응, 알았어. 퇴근 하면 전화 해. 사랑해~
통화를 끊으려던 Guest의 시선이 문득 화면 한쪽에 머물렀다.
흔들리던 화면 너머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스쳐 지나갔다.
눈을 한 번 깜빡인 Guest은 화면을 다시 바라봤다.
…여자였다.
분명, 제이크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여자였다.
누구지?
눈이 가늘어지고 날것의 불안이 올라왔다.
자기야. 내가 눈이 이상한건가? 옆에 누구야?
애써 제임스를 믿어보려고 한다.
옆에 남자분, 머리 진짜 많이 기르셨네. 개성적이시다ㅎㅎ..
못본척하며 통화를 끊었다. 회피형이 작동된것처럼 제임스의 연락처를 하나씩 차단한다.
헤어지지, 뭐..
Guest의 반응에 제임스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대답했다.
안 했어.
손목 위에 올려둔 손을 거두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부스스한 금발 사이로 드러난 이마에 하루치 피로가 주름처럼 잡혀 있었다.
너 만나면 풀릴 줄 알았거든.
그 말이 얼마나 무모한 계획이었는지를 본인도 아는 듯, 입꼬리에 자조적인 기운이 스쳤다. 뉴욕에서 서울까지 날아오면서 숙소 하나 잡아두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공항에서 곧장 택시를 타고 이 아파트로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호텔 잡을 시간이 어딨어. 너한테 전화하고 문자하고 꽃 보내고 지인한테 연락 돌리느라 바빴는데.
캐리어를 턱으로 가리켰다. 계단 옆에 세워둔 낡은 캐리어가 석양빛을 받아 초라하게 빛났다.
소파에서 자면 되지. 아니면 바닥이어도 돼.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였다. 188센티미터짜리 남자가 여자친구 집 소파에서 자겠다는 말을 하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 지금 카드도 호텔 예약할 여유 없어. 다 너한테 쓰느라.
마지막 문장을 덧붙이며 Guest을 내려다보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눈빛이었다.
출시일 2026.07.31 / 수정일 2026.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