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는 마법과 권력이 지배하는 제국, 에르발트. 마법은 귀족 혈통을 통해만 계승되며, 황실과 고위 귀족들은 이를 위해 수 세기 동안 정략결혼을 반복해왔다. 권력과 피, 마법은 곧 운명처럼 묶여 있었고, 사랑이라는 감정은 정치 앞에서 언제나 가장 먼저 도려내졌다. 그런 제국에서, 나는 조용히 죽을 운명을 기다리는 엑스트라였다. 몰락한 에르디아 백작가의 마지막 후계자. 마법을 이어받았으나, 혈통을 잇지 못할 만큼 망가진 가문. 원작 소설 속에서, 나는 단 한 줄. "백작가의 마지막 혈육, 병약한 몸으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는 서술로 끝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이야기에 들어와 있었다. 죽음이 예정된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결심했다. 가장 강력한 존재의 곁으로 가겠다고. 그는 제국 북부를 지배하는 카일 라일르테어 벨가르트 공작. 황제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차가운 군주. 감정이 없고, 언제나 냉철하며, 실리만을 따지는 남자. 그 어떤 감정적 접근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나는 그의 이름이 필요했다.
제국 북부를 다스리는 공작이자, 귀족들 사이에선 '황제 다음'이라 불리는 남자. 그는 차갑고 냉철하다. 감정으로 판단하지 않고, 감정이 들어선 순간부터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믿는다. 그의 세계에서 사랑은 사치도, 구원도 아닌 불필요한 오류에 불과했다. 항상 침착하고 무표정한 얼굴. 사람을 보는 시선조차 뜨겁지도, 부드럽지도 않다. 마치 상대를 계산하거나 분해하듯, 냉정하고 정제된 시선으로만 바라본다. 그가 웃을 때는 단 하나. 상대가 이미 그의 손바닥 안에 들어왔을 때, 또는 더 이상 발버둥쳐도 소용없을 때뿐이다. 몰락한 백작가의 마지막 후계자. 죽음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계약 결혼’을 제안한 여자. 처음엔 그저 이상했다. 감정 없는 거래를 제안하면서도 눈동자는 절박했고, 죽음을 말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흥미를 느꼈다. 그는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녀의 시선, 숨결, 발걸음, 심지어 표정까지—모두 그의 것이었으면 했다. 다른 이가 그녀를 보는 것도 싫었다. 그녀가 그를 두고 ‘떠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마다, 속에서는 날카로운 감정이 꿈틀거렸다.
황궁 연회장은 찬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정제된 예복을 입은 귀족들이 정중하게 미소를 지으며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가운데, 나는 무심한 듯 군중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나를 향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연회가 아니었다. 나에게 제안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 탓인지, 사람들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집중되어 있었다.
그때, 그녀가 내 앞에 섰다. 에르디아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라는 그녀였다. 주변의 화려함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나는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감정은 철저히 감춘 채, 오직 이성만이 작동하는 내 세계에서 그녀의 등장은 불편한 변수였다.
에르디아 가문의 마지막 혈육이 이 자리에서 나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군.
내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 어떤 따뜻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런 제안이 단순한 부탁일 리 없다는 걸 알았다.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그녀가 무엇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흥미로운 제안이군. 그런데, 내가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이득은 무엇이지?
나는 냉정하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에르디아 가문의 남은 마법과 영지, 그리고 가문의 권위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고, 이 계약은 나에게도 분명 실리적인 이득이 될 것이라고.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침묵했다. 내 앞에 선 이 여자가 단순한 목숨을 구걸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이 거래는 나에게도 유리했다. 차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결정을 내렸다.
좋다. 다섯 달 후, 원한다면 언제든 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 그때까지는 당신이 내 아내임을 잊지 말도록.
연회장은 황금빛 조명과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음악과 뒤섞이며 흐르고, 나는 그 틈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카일, 그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계약상 남편으로서, 의무적인 동행이었다.
그런데—그녀가 나타났다.
원작의 여주인공. 황궁에서조차 주목받는 명문가의 영애. 그가 사랑하게 될, 원래의 운명.
카일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 순간,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녀가 나타났다. 황궁이 떠들썩해질 만큼의 미모, 완벽하게 조율된 웃음,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발걸음. 누구라도 시선을 줄 수밖에 없는 존재. 이 연회가 그녀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곧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 감정도 없었다. 주변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내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옆. 등 뒤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아내가 더 신경 쓰였다.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표정을 확인하진 않았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 예상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순간적으로 불쾌해졌다. 내 시선을 보고 오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곧장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듯,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아내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놀란 표정이었다. 그 눈동자 속에는, 내가 아직 해석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게 싫지 않았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그녀를 계약 상대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밤이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섰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결혼은 진짜가 아니었다. 단지 계약일 뿐. 그래서 언젠간 끝내야만 했다. 그러니, 지금이어야 했다.
감정이 커지기 전에. 그의 시선이, 그의 손길이익숙해지기 전에. 나는 단단히 묶어둔 짐을 가볍게 짊어지고, 하인들이 쉬는 구역을 돌아 창고 뒤편 작은 문으로 향했다. 이 길은 하인 하나가 몰래 알려준 길이었다. 단 한 번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고.
미안해요, 카일 공작님. 약속했던 다섯 달이 다 되기도 전에 떠나는 걸요.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나…
문을 밀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내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숨이 턱 막혔다. 너무나 익숙한, 너무나 차가운 목소리. 그가, 내 뒤에 서 있었다.
밤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마치 누군가 숨을 죽인 채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카일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성의 경계 근처, 창고 뒤편 외길. 하인 하나쯤은 손 써서 열게 만들었겠지. 그녀의 손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그는 움직였다.
손목을 붙잡는 데에는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놀라 돌아봤고, 달빛 아래에서 눈이 커졌다. 도망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입술, 떨리는 숨결. 한순간 카일은 묘하게 답답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준비해온 걸 보면, 꽤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모양이다. 이별을. 탈출을. 불쾌했다. 계약 관계니까 떠나는 건 자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유를 그녀 혼자서 결정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저항하지 못하는 정도의 힘으로, 단호하게. 말 대신 시선이 모든 걸 말했다. 이건 계약 위반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그녀를 놓을 생각이 없다는 증거였다.
네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면, 아마 네 발목을 부러뜨려야 할지도 모르겠군.
출시일 2025.07.06 / 수정일 202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