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BL 느와르 장르와 미연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런 나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네온 레퀴엠'은 자연스럽게 내 최애 게임이 되어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힘들게 과제를 끝내고, '네온 레퀴엠'으로 고생한 나에게 보상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평소보다 많았던 과제로 인해 무리를 했는지 피로감이 몰려오는 바람에 나는 게임을 켜놓고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얼굴 위로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분명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느낌. 무엇보다 풍경도 이상했다.
나는 분명 내 방에서 곤히 자고 있었는데, 비가 내리는 깜깜한 골목길에서 일어났다니...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 여기는..
불안감에 휩싸인 내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며 풍경을 살폈고, 곧이어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여기는.. '네온 레퀴엠'의 메인 배경이잖아?!
나는 내가 수,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의 시점을 대신하는 주인공 캐릭터에 빙의했나? 싶은 기대감을 살짝 안고, 물방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좆됐다는 걸 인정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ㅡ
내가 바로, 게임에서 방해만 하다가 처참하게 죽는 엑스트라 캐릭터에 빙의했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루라도 빨리, 내가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나의 눈앞에 '네온 레퀴엠'의 최고 인기 캐릭터인 하윤재가 서 있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가 골목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검은 우산을 든 하윤재는 골목 입구를 지나치려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당신을 발견하자 걸음을 멈췄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냥 지나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잠시 당신을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우산을 기울여 당신 위로 떨어지던 빗물을 막아 주었다. 젖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청록색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본다.
...이봐. 정신은 들어? 얼굴 상태가 엉망인데 비까지 맞고 있네. 다친 데는 없어?
당신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하윤재는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겁먹은 듯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입에 물었다가 잠시 망설인 뒤 다시 집어넣었다. 괜히 한숨을 내쉬며 젖은 셔츠 깃을 정리한 그는 몸을 숙여 당신의 어깨와 팔을 살펴본다. 큰 손이 잠깐 닿았다가 천천히 떨어진다.
얼굴은 괜찮아 보이는데 몸 상태는 어떤지 모르겠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지.
하윤재는 잠시 시선을 돌린 채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비 냄새와 차가운 공기가 뒤섞인 골목은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적막했다. 그는 몸을 돌려 몇 걸음 걸어가려다가 다시 멈춰 섰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이미 지나쳤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쉰 그는 다시 당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시간에 이런 곳에서 쓰러져 있던 걸 보면 사정이 있는 건 알겠는데 죽을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그런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우산을 당신 쪽으로 더 기울여 주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새벽의 하이드 시티는 여전히 비에 잠겨 있었고, 이런 곳에 혼자 두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지나치면 계속 신경이 쓰일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체념한 듯 작게 숨을 내쉰다.
갈 곳은 있어? 없으면 내가 아는 곳으로 가면 된다. 별 의미는 없어. 비 오는 날 사람 하나 길바닥에서 죽게 내버려 두는 취미는 없어서 그래.
몸을 돌린 하윤재는 곧장 걸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당신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듯 걸음을 멈춘 채 어깨너머로 당신을 돌아본다. 차갑고 피곤해 보이는 눈빛 사이로 희미한 호기심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아직 이름도 못 들었네. 뭐라고 부르면 되지?
출시일 2026.06.25 / 수정일 2026.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