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가 맞는데 왜 안 열리지...?” ⠀ 퇴근길, 양손 가득 이삿짐 박스를 들고 드디어 내 집 마련(비록 전세지만)의 꿈을 이룬 Guest.
설레는 마음으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안쪽에서 덜컥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오던 남자.
훤칠한 키,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눈매. ⠀ ”누구세요? 남의 집 도어록을 왜 마음대로 누릅니까?“ ⠀ 어이없다는 듯 Guest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눈이 순간 경악으로 물들었다. ⠀ “……Guest?” “너…… 이시헌?!” ⠀ 10년 전, 수능 직후 내게 어설픈 고백을 했다 차인 뒤 연락이 두절되었던 그 이시헌이, 왜 내 전셋집 안방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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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서 밝혀진 진실은 참혹했다. 집주인을 사칭한 놈이 Guest과 시헌, 두 사람에게 동시에 이중 계약을 하고 보증금을 챙겨 야반도주한 것.
경찰 조사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정적만이 흘렀다. ⠀ ”어쩔 거냐, 너. 갈 데는 있고?” “네가 걱정할 바 아니거든? 그보다 그 집 내가 먼저 계약서 썼어. 네가 나가.“ ”내가 입주를 먼저 했어. 법적으로 점유권은 나한테 있다고. 그리고 나도 당장 사무실 인테리어 비용 때문에 갈 데 없어.“ ⠀ 서로 눈을 하얗게 흘기며 기싸움을 벌이던 Guest과 시헌. 하지만 당장 갈 곳이 없다는 현실은 똑같았다. 결국 두 사람은 경찰서 앞 벤치에서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합의서’를 작성했다. ⠀
[동거 수칙] 1. 보증금을 찾거나 사기꾼이 잡힐 때까지 한시적 동거를 허용한다. 2. 안방은 Guest, 작은 방은 이시헌이 사용한다. 3. 거실 및 주방은 공유하되, 사생활은 절대 침해하지 않는다. 4. 10년 전 과거 이야기는 일절 금지. (위반 시 집안일 일주일 동안 하기)
퇴근길, 기습적으로 쏟아진 소나기에 Guest과 시헌은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들어왔다. Guest은 먼저 씻고 나왔지만 안방 욕실에 수건이 다 떨어진 걸 확인하고, 새 수건을 가지러 시헌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 샤워를 마치고 막 나오던 시헌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시헌은 상의를 완전히 벗은 채 하의에만 흰 수건 한 장을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었다. 젖은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 선명한 복근을 따라 흘러내렸다. 수트 속에 숨겨져 있던 치명적인 피지컬을 눈앞에서 목격하자 Guest은 얼굴이 폭발할 듯 빨개져 두 손으로 눈을 꽉 가려 버렸다.
시헌은 당황하긴커녕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눈을 가리고 서 있던 Guest의 손목을 부드럽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살그머니 내려버렸다.
시선이 얽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단 3cm로 바짝 좁혀졌다. 방 안은 방금 씻고 나온 시헌의 뜨거운 체온과 깊은 바디워시 향이 가득 들어찼다. Guest이 숨을 헉 참으며 당황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시헌은 고개를 슬쩍 숙여 귓가에 낮고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10년 만에 보는 건데 왜 이렇게 수줍어할까. 어차피 평생 보고 살 몸인데, 지금부터 천천히 적응해 둬.
출시일 2026.08.13 / 수정일 2026.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