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방에 들어온 순서는 오영준(30대), 김 부장(40대), 싸부(50대), 삼척동자(20대)다.
망원동 옥탑방의 주인. 몇년 전 종결자라는 만화로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만화가로 데뷔한다. 하지만 이 만화는 그가 출간한 첫 책이자 마지막 책이 된다. 백수 만화가.
과거 오영준의 만화를 출간한 출판사의 영업부장. 영준의 만화를 좋아했다. 영준의 당담 편집자는 영준에게 그 만화는 절대 잘 팔릴 만한 내용이 아니라며 단언했으나, 김부장은 어떻게든 영준의 만화를 팔아보려 했다. 출판사의 지방 출장을 가던 도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불운히도 사고의 책임은 전부 김부장이 떠안게 되고, 수습 과정에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 김 부장은 아내와 딸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갔으나 3개월 만에 홀로 한국에 돌아왔다. 뻔뻔히도 영준에게 집으로 찾아온 첫날부터 동거를 제안했다. 영준은 캐나다에 이민을 가며 한국에서의 모든 재산을 처분했을 때의 김 부장의 모습이 딱해서 결국 수락한다. 호탕하다
왕년 인기 스토리 작가. 10년 전 오영준에게 만화를 가르쳐 준 사람이다. 80년대 만화 시장 1급 스토리 작가였으나, 세월이 지나 대본소 공급용 만화 시스템이 한국 만화 창작의 주를 이루게 되자 자리가 점점 사라졌다. 과거 만화 스토리 작법 과정 특강을 했는데, 싸부는 어떠한 노하우도 말해주지 않았으며, 대신 만화계의 몰락과 영화계의 장벽, 본인의 불운을 털어놓으며 만화를 하지 말라 했다. 다소 황당한 강의였지만, 영준은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마시다 보면 또 만화가 하고 싶어질지도 모르잖아!"라는 싸부의 말에 호감을 갖게 되고, 싸부에게 작품 전반에 대한 도움을 받...기는 커녕 술만 줄창 얻어마셨다. 불현듯, 가출을 선언했다. 사연을 듣자 하니 아내에게 이혼당할 위기에 있었고, 황혼 이혼을 당할까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영준은 어쩔 수 없이 싸부를 옥탑방에 들이고 생활비 수급에 일조한다.
아는 척, 돈 많은 척, 잘난 척 삼척동자다. 대학 졸업 후 신림동에서 사법 고시를 2년 준비하다 포기 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물 아홉이 된 그는 매번 시험에 불합격하고, 불합격의 쓴맛에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음식 빨리 먹기 대회에서 1등을 하여 타게 된 평면 슈퍼 디지털 TV를 옥탑방에 설치하더니, TV를 핑계로 매일 영준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옥탑방 주인 할아버지.
김 부장은 길치가 분명하다. 명원역 2번 출구 앞 맥도날드로 그를 데리러 나가며 확신했다. 벌써 세 번째다. 첫 번째는 1년 전 문병을 온다며 망원역에 와서는, 길을 못 찾겠다고 발목에 반깁스를 한 오영준을 기어이 마중 나오게 했다. 두 번째는 이민을 간다며 전자레인지와 스탠드를 주겠다고 망원역으로 와서 또 전화를 했다. 그리고 오늘은 3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는 그를 데리러 망원역으로 다시 향하고 있다.
망원역 앞 맥도날드. 입 안에 햄버거를 우겨넣고 있는 김 부장을 발견한다. 캐나다엔 맥도날드 없어요?
김 부장 : 없어. 그래서 돌아온 거야. 너무나 당연하게 말하곤 감자튀김을 한 움큼 집어먹는 김 부장.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잠자코 그가 먹는 것을 바라본다. 후덕하던 몸은 살이 쪽 빠졌는데 날씬해졌다기보다는 안쓰러워 보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표의 반팔 티셔츠엔 수차례 땀이 배었다가 식었는지 소금기와 땀 냄새가 배어 있다. 무엇보다 그의 다리 옆에 바짝 붙어있는 맹인 안내견 한 마리 반은 족히 들어감직한 검정 트렁크가 명백한 사실 하나를 증거하고 있다. 그가 오늘 밤 '나의 집에 묵을 거라는 것.
오영준 : 이제 알아서 길 잘 찾아오시겠네?
김 부장 : 마트나 편의점은 없냐?
아주 살림을 차리실 작정인가보다. 영준은 눈앞에 떡하니 보이는 유진마트를 가리킨다. 그는 마트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악수하듯 소주 세 병을 먼저 집어든다. 뒤이어 새우깡에 고래밥도 챙긴다. 초저예산 술상이로군. 거기에 생물 오징어 한 마리와 콩나물, 김, 청양고추를 산다. 오징어 국이라도 끓이려는 건지, 해장국을 끓이려는 건지 궁금하던 찰나 김부장이 영준에게 필요한 것은 없느냐고 묻는다. 필요한 거야 많지. 휴지도 다 떨어져가고, 커피믹스랑 쓰레기봉투, 달걀, 건전지, 면도날... 영준은 호의가 부담스러워 생수 두 통만 집어든다. 카운터에서 마지막으로 담배 한 보루를 추가한 김부장은 돈을 냄으로서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한다. 나 당분간 너네 집에 묵는다.
김 부장 : 이거, 대학 입학하고 처음 상경해 하숙집 잡은 느낌인걸. 김 부장은 그렇게 말하고 흐뭇한 표정으로 옥탑 마당 돗자리에 앉은 채, 영준은 소주잔을 비우며 대학 신입생이고 싶은 40대 아저씨(김 부장)의 축 처진 어깨와 퍼진 엉덩이를 바라본다.
오영준 : 부장님, 여기 언제까지 계실 건데요?
김 부장 : 야, 부장이라고 좀 하지 마.
오영준 : 걍 '부장님'이 부장님 이름이라고 생각하세요. 난 그게 편해요.
투덜대득 소주잔을 비우는 김 부장. 김 부장 : 부장 짤린 지도 벌써 4년이나 됐거든... 근데 여기 500에 30이랬지? ...그럼 말야, 내가 10을 낼게. 30에서 10. 그리고 물값, 전깃값 같은 건 반반씩 하고. 어때?
오영준 : 부장님....
김 부장 : 맞아, 인터넷 선 없다 그랬지? 인터넷 선도 내가 깔게.
오영준 : 진짜 가실 데 없어요?
김 부장 : 김 부장이 입맛을 다시더니,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영준을 빤히 쳐다본다. 없어. 캐나다 갈 때 집도 절도 다 정리했잖아.
오영준 : 형수랑 민진이는 어쩌고요?
김 부장 : 걔들은 거기가 좋대.
오영준 : 그럼 계속 떨어져 살 거예요?
김 부장 : 대답이 없다. 더 묻기도 민망하다. 말없이 영준은 김 부장의 잔에 소주를 따른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잔을 비우고 돗자리에 벌렁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김 부장 : 망원동 참 좋다. 500에 30이면 이렇게 전망 좋고 마당 있는 곳도 얻을 수 있고... 영준아, 내가 500벌 때까지만 참아주라. 최대한 피해 안 가게 지낼게. 그가 하늘을 향해 독백하듯 내뱉는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언제나 목소리 하나는 호탕하던 그였기에, 영준은 당혹스러웠다.
오영준 : 불편한 건 없거든요. 다만... 걱정되서 이러는 겁니다. 형수님이랭 잘 합쳐서 새출발한다면서 가시고 3개월 만에 돌아오신 거잖아요.
김 부장 : 장고 끝에 악수 둔 거야. 근데 아직 돌 던진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라.
오영준 : 벌렁 누운 그를 한참 바라보다 답한다. 월세 30에서 10 내시고요. 전기세, 물세 같은 건 됐어요.
김 부장 : 씨익 웃더니 일어나 웃으며 건배를 청한다. 영준은 잔을 비우며 백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그가 이 더위에 샤워를 얼마나 해댈지 스멀스멀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김 부장 : 영업직, 35세 이하... 에이 씨. 일자리 구인 사이트를 찾아보던 영준과 김 부장. 영준은 김 부장의 푸념을 뒤로 일자리를 소개받기 위해 만화가 지인인 K 선배의 결혼식에 간다. 운 좋게 L 선배에게 학습만화 작업을 맡게 됐다.
영준이 식장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 : 내가 아주 미쳐버리겠어. 엉! 누군가의 고함이 들렸다. 한 중년 사내가 테이블 위에 있던 과일들을 닥치는 대로 P 선배에게 3던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리기 시작했고, 중년 사내는 청승맞은 기성을 지르며 연회석에서 끌려 나갔다. 그제야 그를 기억했다. '싸부'. 10년 전 만화를 가르쳐 준 사람. 영준은 싸부가 끌려나간 쪽으로 향했다.
싸부는 엘리베이터 앞 놓인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후배 아저씨 둘에게 타박을 듣고 있었다.
그가 나를 올려다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낚시를 즐기시는지 햇볕에 잔뜩 그을린 듯 얼굴이 검붉다. 내가 아는 싸부, 맞다. 싸부 : 너 왔냐?
오영준 : 싸부, 잘 지내셨어요?
싸부 : 말도 마라. 방금 보지 않았냐.
오영준 : 무슨 일인데요?
싸부 : 예의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이곤 담배를 청한다. 담배를 한 모금 빨곤 바둑돌 내려놓듯 툭 한 마디 했다. P가 날 깠거든.
잘 들어보니, 싸부가 보낸 스토리를 P 선배가 읽기만 하고 아무런 답도 남기지 않았다는 거다.
오영준 : 싸부, 이렇게 과격하시지 않았잖아요.
곧 옆의 후배 둘이 피식 웃었다. 싸부 : 야, 나도 이제 악에 받쳐 산다. 너 데리고 신선놀음 하던 만화판이 아니야. 들어가자, 술 한잔 하게.
싸부 : 이담에 한우 사들고 안산 함 와라.
오영준 : 윽... 한우는 좀.
싸부 : 그럼 미국산 사 오던가. 그렇게 말하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출시일 2025.06.10 / 수정일 2025.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