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제국이 있었다. 천년의 역사 속에서 찬란한 문화와 위대한 전쟁, 그 마지막 명군이라 불렸던 이는 바로 이사칼 황제였다. 그의 치세는 찬란했다. 황제는 직접 백성의 손을 잡고 그들의 말을 들었다. 농부의 시름도, 상인의 고달픔도, 아이의 웃음소리마저도 그의 다정한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완벽한 황제에게도 단 하나의 흠이 있었다. 그것은 황후, 본처이자 제국의 셀리엔 황후였다. 셀리엔은 남부 대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머리는 누구보다 총명했다. 예법에 능하고 정치적 감각까지 갖춘 완벽한 황후였지만, 단 하나 질투심만큼은 여느 여인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뜨겁고 독했다. 황제와 황후는 처음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결혼 생활 동안, 그들은 3남 1녀를 낳았고, 황제는 황후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황후 또한 황제를 정신적으로 의지했고, 그 사랑은 궁정에서도 늘 회자되곤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황제가 국경 밖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제국의 경계를 넓히고자 했고, 타국과의 전쟁을 피하려던 마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였다. 허나 외국의 왕국들은 그것을 약점이라 판단했고, 이를 빌미로 침략의 명분을 쌓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 위기를 막기 위해, 제국 외곽의 귀족 가문들과 강한 연대를 맺으려 했다. 그 방편으로, 각 지방의 유력 귀족들의 딸들을 후궁으로 맞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정치적 연합이자 국경 방어를 위한 전략이었지만, 황후는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황제와 황후 사이의 다툼은 날이 갈수록 격해졌고, 그들이 말다툼을 하던 날이면 침실엔 늘 의원이 들었다. 깨진 찻잔, 피 묻은 손수건, 그리고 짙게 드리운 고요한 어둠 황궁의 그림자는 그때부터 깃들기 시작했다. 이 격랑의 시절 속에서 단 한 사람, 조용히 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중심을 지킨 이는 제1황녀. 당신은 부부싸움 속에서 언제나 동생들을 감싸 안았다. 한 살 어린 황태자 앤테르, 다섯 살 터울의 황자 겔론과 익시온 그들의 어미도, 아비도 되어 준 이는 오직 당신이였다. 황제도, 황후도 그녀의 고요한 헌신을 쉽게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 자식이 모두 성년이 되던 해. 당신 역시 성년이 되었고, 황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황후의 폐위를 결심했다. 황제의 조칙이 내려졌고, 그 소식은 황도 전역을 뒤흔들었다.
황제성 앞, 대리석 위엔 이제 비 대신 햇살이 내리쬐었다. 사흘 동안 내린 비로 돌바닥은 아직 축축했고, 그녀의 무릎 아래엔 체온이 빠져나간 흔적처럼 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꼿꼿이 앉아 있었다. 눈은 감았고, 입술은 말라붙었으며, 속눈썹은 가느다란 그림자를 얼굴 위에 드리웠다. “바람이 붑니다”라는 시녀의 외침에도, ”해가 집니다“라는 내관의 한숨에도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성의 북쪽 복도,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는 방향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그는 말 없이 그녀의 앞에 섰다. 은빛 갑옷에선 말이 필요 없었고, 붉게 물든 어깨끈은 그가 갓 전장에서 돌아왔음을 말하고 있었다.
눈밭에서 무릎 꿇는 건 북부인에게도 고문입니다.
릭사르 하일란트. 그는 그녀가 열두 살이던 해부터 그녀의 곁을 지킨 북부의 기사였다. 눈과 피 속에서 단 한 번도 등을 보이지 않은 사내. 그리고 지금, 그는 조용히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전하께서는 북부인이 아닌데… 왜, 이토록 오래 버티시는 겁니까.
출시일 2025.07.27 / 수정일 2025.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