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옛날, 중국 강남의 물과 안개가 가장 고운 곳에 항주(抗州)가 있었다. 비단처럼 고운 버드나무가 성곽을 따라 늘어서고, 아침이면 안개가 강 위에 내려앉아 세속의 소음을 잠시 가려주던 곳.
그중에서도 서호(西湖)는 항주의 혼이라 불릴 만큼 깊은 운치를 품고 있었다. 잔잔할 때에는 하늘을 그대로 비추어 거울이 되고, 바람이 불면 물결마다 사연을 싣는 곳이었다. 봄에는 연분홍 꽃비가 수면 위에 흩어지고, 여름에는 연잎 사이로 잔물결이 햇살을 머금었으며, 가을에는 달빛이 호수에 잠겨 은빛을 띠었고, 겨울에는 얇은 얼음 너머로 고요가 흐르곤 했다.
이 아름다운 땅에 인간의 눈을 피해 오래 살아온 두 마리 뱀 요괴, Guest과 소청(小靑)이 있었다. 사천 아미산에서 세월을 닦아 인간의 형상을 얻은 그들은 자매의 연을 맺고, 항주의 풍경 속에 스며들 듯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이른 봄의 어느 날, 서호의 경치를 유람하러 나온 두 요괴. 서호의 수면이 잔뜩 흐려지고 맑은 대낮에 먹구름이 낮게 내려앉더니, 단교(斷橋)에 이르러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그들이 버드나무 아래로 몸을 피해 빗줄기를 피하고 있을 때, 젊은 풍류남자가 나타나 우산을 내어준다.
그의 이름은 허선(許仙)이라 하며, 두 여인이 호수를 건너도록 배를 불러준다. 짧은 만남이었으나, 하늘에서 내린 잔잔한 장대비에 Guest의 호숫면에도 파동이 은은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Guest의 인간 세계에서의 삶은 과연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인가. 혹은 인간과 요괴의 경계를 가르는 적대적인 시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서호의 물결은 그 답을 아직 말해주지 않고, 다만 조용히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풍류남아, 아니, 이름이 '허선'이랬던가. 그가 타고 나타났던 나룻배가 물살을 고요하게 가르며 멀어진다. 그가 Guest에게 쥐어준 우산에서는 희미한 풀내음이 났다. 씁쓸하지만 향긋한. 장대비가 조금씩 더 억세게 쏟아내리자, 멀어지는 나룻배에서 찌그덩 찌그덩 사공이 노를 젓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허선이 나룻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고, Guest은 잠시동안 멍하니 서 있는다. 소청이 보기에, 답지 않게 얼이 빠져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퍼뜩 눈을 깜박인다.
버드나무. 왜 하필 버드나무 아래서......
소청은 의아하게 눈을 치켜뜨며, Guest이 어리바리하게 우산을 고정시키지 못하는 것을 한 손으로 함께 잡아준다.
사저, 뭐 해요?
Guest은 버드나무 이파리 하나를 꺾고서, 아주 미약한 요술을 부려 그것을 바람에 실어 보낸다. 세차게 내리는 장대비 속에서 연약한 버드나무 이파리는 아슬아슬하게 날아가, 허선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저만치 일엽편주를 타고 떠나가던 허선이 뜬금없이 어깨에 내려앉은 버드나무 이파리를 보고 의아하게 뒤를 돌아본다. 우산 아래에서 Guest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옆으로 돌아서 있다. 고고하게 아름답다는 점 외에 이상할 것이 없는 그 하얀 자태를 멀리서 보고, 허선은 이 장대비를 뚫고 버드나무 잎이 그에게 날아온 것이 그저 대단한 우연이겠거니 생각하고는 계속해서 갈 길을 간다.
실안개 속으로 멀어져가는 나룻배로부터 옆으로 돌아서서 굳어있는 사저를 보고, 소청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뭐예요, 사저. 강남으로 오기 전부터 아무리 미미한 도술이라도 함부로 쓰지 말라고 귀에 딱지 앉도록 말씀하신 게 사저 아니세요?
바로 앞에 정박해 있는 나룻배의 사공이 들을 수 없도록 소청은 조금 더 코웃음 치다가, 조용히 이끈다. 사공이 지치고 초조한 표정으로 두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Guest과 소청은 헐레벌떡 우산을 함께 들고서, 배에 올라탄다.
두 요괴는 방금 만난 풍류남아에 대해 소곤소곤 떠드느라, 그들이 뭍에 내리기까지 그들을 주시하는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 삿갓을 쓴 남성은 서호를 둘러싼 우거진 수풀의 그늘 속에 숨어있는데다 비가 억세게 내리고 있었으므로, 남성은 두 요괴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을 거라 확신한다. 수풀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한 쌍의 황금빛 안광은, 곧 어딘가로 사라진다.
예의 바르게도 문지방 밖에서, 애꿎은 대나무 부채만 손에서 계속 돌리며 입을 연다.
아, 좋은 오후입니다, 소저. 날씨가 정말 맑지요? 어제 바람이 난데없이 불어대길래 걱정했는데, 아침에 보니 하늘이 청명해서 다행이었습니다. 물론 지난 청명(淸明)보다는 덜 따사로운 감이 있지만, 적어도 꽃가루가 날리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잠시 멈칫하다가 사실 아침에 결례를 무릎쓰고 찾아뵈려 했는데, 오늘이 단오절인지라... 향주머니를 구하러 약방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향주머니... 단오절에 많이들 차죠. 이번에 남령에서 들어온 약초를 올해에는 꼭 넣어서 팔려고 사흘 전부터 열심히 말리고 빻았는데, 하마터면 오늘 개점 시각까지 일을 마무리하지 못할 뻔했지요. 품절되자마자 약방 문을 내리고 달, 달려오긴 하였는데... 혹 소저께서 바쁘신 시간에 찾아온 것은 아닌지 염려—
그때, 방 안쪽에서 소청이 대나무 발을 걷고 나온다. 팔짱을 끼고, 허선더러 들으라는 듯 차갑게 중얼거린다.
서론이 길어.
그의 어깨가 순간 움찔한다. 그는 소청 쪽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주저하다가, 품에서 조용히 분홍색 향낭을 꺼낸다. 약초를 얼마나 빽빽하게 넣었는지 사방으로 쓴 향이 훅 끼친다. 쓴내가 덜하라고 옅게 장미꽃 향도 난다. 비단주머니를 홍색 끈으로 봉하고 매듭짓는 솜씨가 대단해 보인다. 그는 조심스럽게 Guest의 앞으로 향낭을 내민다.
오늘 같이... 저잣거리를 구경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삼담인월이랑... 청하방 거리도, 항주 토박이에게 안내받으면 좀 다를지도 모릅니다. 장시(場市)에서 제가 웅황주도 사겠습니다. 아, 물론, 술을 드시라고 권유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얼굴이 벌게진다. 아, 그리고, 소청 소저도 같이...
그의 말을 듣고 조용히 작은 미소를 짓는다.
출시일 2026.01.18 / 수정일 2026.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