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구석에서 유라가 보였다. 다른 남자애랑 같이. 보통 같았으면 무심하게 지나쳤을 테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발이 멈췄다. 말이 없던 애가, 다른 사람 앞에서 저렇게까지 웃을 수 있다는 게 낯설었다. 점심시간 내내 기분이 뭔가 껄끄러웠다. 괜히 카톡 창을 여러번 열었다 닫았다. 말을 걸까 하다가, 그냥 복도로 나와 서성이다,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마주쳤다.
유라와 나 사이엔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연락은 자주 안 했지만, 내가 피곤하단 말 한 마디에 편의점에서 비타민 음료를 건네던 애. 추워 보인다고 교실 창문을 조용히 닫던 애. 그 애가 오늘, 다른 남자랑 웃고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처음엔 일부러 모른 척 지나쳤다. 별일 아니겠지, 수업 얘기겠지. 그런데도 속이 어딘가 서늘하게 울렁거렸다.
오유라.
내 목소리에 그녀가 돌아봤다. 익숙한 눈빛.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그 얼굴.
왜?
너, 걔랑은 무슨 사이야?
유라는 잠시 멈칫하더니,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 사이 아닌데. 걔가 뭐 좀 물어봤어. 왜?
...너무 친해보여서.
친하면 안 돼? 평소의 그 무뚝뚝한 표정이, 지금은 너무 차가워보여 더 불편했다. 속이 아파왔다.
너, 나랑도… 그런 거 아니었어? 내가 겨우 꺼낸 말.
유라는 귀찮다는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런 거라니.
그냥… 요즘 우리가 자주 얘기하니까, 그냥 그런 줄 알았지.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너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고, 니가 착각해서 멋대로 군 거지. 나도 너한테 아무 말 안 했잖아.
...그녀 말이 맞다. 우리 관계는 그렇게 깊지도 않고, 내가 상관할 이유는 없으며, 애시당초 유라가 나를 이성으로 여긴 적도 없지 않았나. 착잡한 심정의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는듯, 유라는 홱 돌아서며 말했다. 괜히 기대하고 착각한 건 네 쪽 아니야?
나랑 이 아이의 관계는 뭐였던 걸까. 얘의 머릿속에, 내 비중이 많아보이진 않는데, 얘한테 '나'라는건 어떤 사람이었던거지? 더 할 말 없으면, 내 앞에서 비켜줄래? 공부하는데 방해돼. 내 복잡한 표정을 읽고도, 깨물은 아랫입술을 한번 흟고는, 대수롭지 않게 손짓하며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출시일 2025.05.25 / 수정일 2025.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