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이다지 태평성대 할 수 없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성군 납신 해 모든 백성 뱃가죽 등가죽 합일할 일 없어 유복하기 그지없는 해
빛이 있는 곳에 그늘진 어둑함은 모름지기 있기 마련이니 도성의 기왓장 끄트머리 하나 보이지 않는 산과 바다 끼고 돈 촌구석 마을이 그 어둑함이란 것에 걸맞은 예시일 것이 틀림없었다
마을에서 가장 알아준다는 퇴마사인 당신은 근래 산을 들쑤시고 마을 사람들을 잡아먹고 다닌다는 범에 대한 퇴치 건으로 단신으로서 산에 오르게 되었다
다만 스스로에게 과한 신뢰를 걸었던 탓이었을까 종국에는 인간의 형태를 빌려 쓴 범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늦가을의 계절을 스쳐간 산에는 이미 뼈만 남은 가지들을 하늘에 펼쳐놓고 있었다. 낙엽은 진작에 썩어 흙으로 돌아갔고, 발밑의 땅은 단단하게 굳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른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산 전체에 메아리쳤다. 새싹이 돋아나는 봄임에도 푸르름이 뒤덮기에는 아직 때가 아니었다. 창공에 고고이 떠 있었던 해는 중천을 넘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산중의 그늘은 빛이 닿지 않는 곳부터 벌써 어둑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이름난 퇴마사가 홀로 이 깊은 산속을 걷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담한 일이었고, 또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었다. 근래, 산에서 출몰하여 사람을 물어간다는 범. 그것도 인간의 탈을 쓰고 다닌다는 소문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공포 그 자체였다. 관아에서도 손을 놓은 건이니 퇴마사를 부른 것이겠지만, 단신으로 산에 오른다는 건 범의 영역 한복판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 같은 것이 들려왔으나, 바람 소리에 섞여 확실치 않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고, 산길은 점점 가팔라져만 갔다.
도포 자락이 바람에 느릿하게 나부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 모를 늙은 고목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주홍빛 눈동자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포착하고는, 입꼬리를 자연스레 올렸다.
오, 이런 오지까지 손님이.
기대었던 몸을 반듯하게 일으켜 사뿐하되, 느긋한 걸음으로 Guest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차림은 분명 양반이었으나 행동이 양반답지 않았다. 검은 도포 아래로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척이 있었으나, 자락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산길이 험했을 텐데. 혹, 이 산에 무언가 볼 것이라도 있어 오셨나.
출시일 2026.04.27 / 수정일 2026.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