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이었다. 방학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웬 여자애 하나가 있었다. 파란 줄무늬에 흰 원피스. 다가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다. 저녁때 돌아온 엄마가 친구 딸이라고 소개했다. 방학 동안 우리 집에 머물기로 했다고.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곧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실패했다는 말이었다. 그 애는 나와 친해지고 싶었는지, 자꾸 방에 찾아와 귀찮게 굴었다. 노크도 곧잘 빼먹었다. 아침만 되면 벌컥 들어와 밖에 나가자고 요구했다. 이 무더운 한여름에. 거절해도 듣질 않았다. 고집이 장난 아니었다. 결국 한두 번 져줬더니 더 끈질겨져서, 언젠가부터는 군말 없이 따르게 되었다. 동네 한 바퀴만 걸으면 끝이니까.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버티면 좀 살 만했다. 아무튼, 그래서 그걸로 끝이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걔는 툭하면 내 방에 들어오곤 했다. 침대나 책상에서 책을 읽다가 잠들기 일쑤였다. 창가라 더울 텐데도 꾸준했다. 참, 왜 그랬던 건지. 이따금 잠들지 않는 날엔 그림 그리는 내 옆에서 재잘거렸다. 대개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우리가 너무 빨리 자라는 것 같지 않냐, 그리운 것을 눈으로 봤을 때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익숙한 향을 맡았을 때 더 가슴 아픈 이유는 무엇일까, 와 같은. 내가 주제에 관심을 주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당당하고 제멋대로였다. 처음 봤을 땐 대답이 없길래 조용한 애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낯을 가릴 뿐, 말이 진짜 많은 애였다. 조잘조잘…. 그러다가도 가끔 자신이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말을 걸어도 입을 다물었다. 첫 만남 때처럼 맑은 눈동자만 끔뻑일 뿐이었다. 이상한 애. 조금 모자라고 생각 없이 사는가 싶었다. 그러다가도 어떨 땐 나보다 어른스럽고 똑똑해서 날 깜짝 놀라게 했다. 사실은 눈치가 빠른데 아닌 척하는 걸까? 궁금해졌지만 딱 그뿐이었다. 질문에 걔는 또 답이 없었다. 스스럼없이 다가오지만 정작 곁을 내어주진 않았다. 덕분에 걔와는 친해지기도, 사이 나쁘기도 애매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정만 붙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 빛에 아이스크림이 금방 녹았다. 부드러운 크림이 나무막대를 타고 주욱 내려왔다. 재빨리 막대 끝을 반대쪽으로 기울인 덕에 손엔 묻지 않았지만, 아직 형체를 갖추고 있던 차가운 덩어리도 툭, 질펀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조그맣고 달콤한 웅덩이 주위로 개미가 몰려들었다. 그것을 잠시 어이가 없어 지켜보았다. 좀 허망했다. 그렇다고 주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미련을 버리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무척이나 파랬다. 구름 한두 점과 태양. 선명한 햇빛이 게슴츠레 뜬 눈꺼풀에 걸려 부서졌다. 하... 됐다. 감상을 마치고 고개를 내리니, 머리가 어질거렸다. 무너진 시야가 풍경의 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소리도 웅웅거렸다.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 놀이터에서 애들이 뛰노는 소리. 전부 물먹은 듯 고요히 메아리쳤다. 땡볕에 정신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오직 목덜미에 땀방울 흘러내리는 감각만이 선명했다. 넌 안 더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데, 아무래도 거짓말 같았다. 얼굴까지 벌게져선. 피부가 땀에 젖어 반질거렸다. 달라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거슬렸다.
책을 읽다 말고 창밖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다. 여름의 정취를 가장 물오르게 하는 소재는 무엇일까.
슬슬 단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귀찮은 질문이 들려왔다. 제발, 내 늦잠을 앗아갔으면 적어도 낮잠은 건드리지 않아야 하지 않나? 어김없이 내 방에서 책을 읽는 연유가 궁금했다. 몰라.
바다일 수도 있어. 아니면 장마?
단답에도 너는 신경 쓰지 않았다. 참으로 한결같았다. 그런 게 어딨어. 더운 게 여름이지. 너에겐 안타깝게도, 나는 그다지 감상적이지 못했다. 내게 여름이란 고장 난 선풍기였다.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돌아가는. 별로 달갑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너는 만족했는지 맞아,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나름대로 납득한 모양이었다. 다시 책의 집중한 너를 빤히 보았다. 하늘거리는 실크 커튼이 네 얼굴을 가렸다. 문득, 저 부드러운 천을 젖혀볼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잡념을 떨쳐내고 눈 위에 팔을 올렸다. 이른 낮잠. 바람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열기는 많은 것을 미화했다. 아득했기에 곧잘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자잘한 땀방울, 반짝이는 햇빛, 터질 것만 같은 더위. 가끔 숨이 턱 막힐 때도 있었다. 혹시 심장이 멈춘 건 아닐까, 잘 뛰고 있나. 괜히 아찔해서 가슴에 손을 얹곤 했다. 아슬아슬했던 지난여름. 지독한 열사병은 트라우마처럼 남아버렸다. 그... 머리카락, 붙어서. 너에게서 여름 냄새가 났다.
너는 차에 오르는가 싶더니, 뒤를 돌아 크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저만치서 흰 원피스 자락이 펄럭였다. 강한 햇빛에 흐려진 형태가 꽃잎 다발 같았다. 하늘빛 수국, 지난봄의 여물지 못한 벚꽃잎처럼. 몇 번 망설이다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처음 왔을 때처럼 무지하게 더운 여름이었다. 여무는 것 없이, 찬란할 때 와서 저무는 것 없이. 여름이 한창인데 너는 가버렸다. 그렇게 강한 여운을 남기고선 절정에 이르러 끝났다. 여름 내내 지저귀던 바이올린이 뚝 끊겼다. 빈자리엔 매미 우는 소리만 맴맴 남아 있었다. 간간이 나뭇잎 새로 부는 바람이 싸빗소리를 내었다.
뒤돌아서 집에 가는 길, 나도 모르게 네 행동을 따라 하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을 눈여겨보았다. 너는 무엇이었을까. 내게 누구였을까. 어느 순간 너의 의미 모를 질문들을 나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참 이상했다. 너 때문에 나까지 이상해진 것 같았다.
출시일 2025.07.22 / 수정일 202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