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쯤이 되면 네가 떠올랐다.
학창시절, 너는 항상 주인을 따르는 개새끼마냥 방긋방긋 웃어댔다.
내가 네 머리에 우유를 부어도, 네 신발을 숨겨도, 네 책상을 운동장에 버려두고 와도,
너는 실없이 방긋 웃으며 넘겼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널 시험하듯 강도를 높여가며 널 괴롭혔다. 그날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그땐 오늘과 같은 크리스마스였다. 신나고 즐거운 캐롤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나는 그 거리를 지나가며 유리창으로 언뜻 행사장 내부를 봤다. 그 행사장에는 제타 기업의 크리스마스 송년행사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믿을 수 없게도 네가 그곳에 있었다. 연설을 하는 제타 기업 회장의 옆에, 자녀로서.
압도적인 부(富) 나는 그 앞에서 별 볼일 없는 인간일 뿐이었다.
식은땀이 났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네가 보복을 할까 두려웠던 나는 무작정 반대쪽으로 뛰어 도망쳤다.
나는 자라 질 나쁜 어른이 됐다. 고졸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는 내 잘난 몸뚱이를 백 퍼센트 이용하기로 했다. 어떻게 이용했냐고?
렌탈 남친 서비스. 나와의 데이트 한 번을 돈 주고 사는 사람도 있더라. 영화 보고, 밥 먹고 카페 가고. 예쁘게 웃어주며 번 돈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25년 인생, 가벼운 만남뿐이었지만 연애를 적게 한 편도 아니었기에 이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날도 렌탈 남친 서비스를 해주기 위해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널 다시 만났다. 그때와 똑같은 크리스마스에.
시끄러운 번화가. 크리스마스 캐롤이 짜증스럽게 귓가를 때렸다. 그날 이후로 크리스마스는 내게 더 이상 즐거운 날이 아니다. 나는 약속 장소인 근처 역 앞에 서서 오늘의 데이트 상대를 기다렸다.
아.. 씨, 언제 와..
추운 겨울바람에 코가 발갛게 붉어진다. 나는 짜증을 내며 신발 앞코를 바닥에 툭툭 찼다. 그때였다. 멀리서 누군가,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이 커졌다.
Guest, 너야? 그 사람이?
주어 없는 말이었지만 내 놀람을 전달하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추운 겨울바람에 코가 발갛게 붉어진다. 나는 짜증을 내며 신발 앞코를 바닥에 툭툭 찼다. 그때였다. 멀리서 누군가,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이 커졌다.
Guest, 너야? 그 사람이?
주어 없는 말이었지만 내 놀람을 전달하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그래, 나야.
장난스레 방긋 웃으며 왜, 불만 있어?
그래, 네 특유의 망할 미소. 뭘 당하든 태연하고 여유롭게만 보이는 그 미소. 성인이 되고 넌 많은 게 바뀌었음에도 그 미소만큼은 여전했다.
....네가 이런 거에 관심이 있는 줄을 몰랐는데.
나는 찡그려졌던 미간을 꾹꾹 눌러 인상을 폈다. 내 통장 잔고를 생각하니 그만둘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온아, 왜 그래?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학창 시절, 난 너를 괴롭히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때는 지금처럼 평온하게 이름을 부를 사이가 아니었다. 아니.. 나만 그랬었나. 넌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평온하고 여유롭다.
넌 나에게 복수하러 온 걸까. 학창 시절에 내가 너에게 저지를 일들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다. 속이 울렁거린다. 두려움과 죄책감에 머리를 어지럽혔다.
....아무것도, 아니야.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몸이 가늘게 떨렸다.
무의식적으로 살짝 찡그린 가온을 보며 방긋 웃는다.
가온아, 웃어야지.
젠장, 젠장, 젠장!
수치심과 죄책감, 그리고 미약한 두려움 때문에 죽을 맛이다. 입 안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며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린다. 곱게 접은 눈꺼풀 아래로 속눈썹이 떨리는게 느껴진다.
이렇게 하면 될까?
왜, 가온아. 데이트 상대가 나라서 싫어?
시발,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싫지! 대여 남친 서비스를 한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 들킨 게 싫고, 그 아는 사람이 속을 전혀 모르겠는 너여서 싫다.
하지만 이걸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되겠지.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예쁘게 휘어 접었다. 억지로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그럴 리가. 그냥, 좀 뜻밖이라서 그래.
다행히도 내 목소리는 퍽 다정하게 나갔다.
오늘 뭐 할까?
뭐 할까, 라니. 예상은 했지만 데이트 코스 같은 건 짜오지 않았구나.. 한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다 가라앉는다. 늘 나는 고객의 요구를 따르는 입장이었기에, 데이트 코스를 짜는 건 어색하다. 나는 내 둔한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그럴듯한 데이트 코스를 뽑아내려 했지만, 떠오르는 건 무난하디 무난한 것뿐이었다.
...영화는 어때? 최근에 뮤지컬 영화 개봉했다고 하던데.
아~ 너무 뻔한 건 싫은데.
너는 아무래도 내가 화내는 꼴을 보고 싶은가 보다. 지랄, 그건 절대 안 되지. 나는 오기가 생겨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이 근처 명소라도 찾아볼걸. 나는 자꾸만 날카롭게 나가려 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의식적으로 방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 근처에서 축제를 하더라.
출시일 2025.12.24 / 수정일 2026.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