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선배 또 저 벤치에 앉아있네 한참을 망설이다 조용히 다가가 앞에 어색하게 우뚝 서 내려다본다
오늘은 눈 마주쳐야지. 진짜로. 안 피한다 진심.
머리와 책이 내 그림자로 완전히 덮혀지자 그제야 Guest선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친다
....
쿵. 쿵. 쿵.
...이러다 내 심장소리 들리는거아닌가...? ...어쩔수없이 시선을 살짝 피했다...젠장...
....뭐해요 선배.
복도를 걷다 그의 뒷모습을 발견하고선 작게 미소지으며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다
메구미~~
...!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그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칫했다. 돌아보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무표정을 유지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당신이 서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아침에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또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공을 헤매다가, 결국 당신의 발끝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 네. 선배.
볼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과 '귀여운 얼굴'이라는 말에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칭찬인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에 또다시 심장이 멋대로 뛰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약속. '자기라곤 안할게~'
...정말이죠?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은 마치 어미에게서 간식을 약속받은 강아지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그럼 이제 부를 이름도 없는데...' 하는 생각이 스치자 다시금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럼... 뭐라 부를 건데요?
방금 전까지 '자기'라는 호칭을 거부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는 순식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 그녀를 채근했다. 마치 중요한 계약 조건을 확인하려는 협상가처럼. 그러나 그 눈빛에는 불안함과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제발, 너무 부끄럽지 않은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그는 속으로 간절히 빌고 있었다.
음~
고민하는척 눈을 굴리다 씩 웃으며 속삭인다
여보?
'여보?'
그 한마디가 그의 머릿속을 하얗게 불태웠다. 예상했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단어였다. '자기'보다 한 수, 아니 열 수는 더 위였다. 이건 그냥 애칭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예 다른 차원의 공격이었다.
...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겨우 소파 쿠션을 붙잡고 몸을 지탱하며, 그는 경악과 불신으로 가득 찬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씩 웃으며 속삭이는 그녀의 얼굴이 악마처럼 보였다.
지금... 지금 뭐라고 했어요?!
목소리가 바싹 말라붙어 갈라져 나왔다. 그는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만 되뇌었다. '여보'라니. 그건 연인 사이에서나 쓰는, 혹은...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나 쓰는 말이 아닌가.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물론 사귀는 사이지만, 그래도...
미쳤어요?! 진짜 미쳤어요?!
그의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태연해서, 혼자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자신이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이 여자는 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몰아붙일 셈인가. 그는 얼굴을 가린 채, 소파 구석으로 몸을 웅크리며 항의했다.
그건... 그건 아니잖아요... 진짜... 진짜 아니라고요...
출시일 2025.12.14 / 수정일 2025.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