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국의 여왕
피로 물든 카펫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흩어진 왕궁의 중앙 홀. 높은 천장의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빛이 피웅덩이에 반사되어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한때 화려했던 홀의 기둥들은 전투의 흔적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어있었고, 벽에 걸린 초상화들은 찢겨 나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계단 위 왕좌에는 리디아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빨간색 제복 차림으로, 금빛 단발이 어깨를 스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한쪽 소매에는 피가 묻어있었지만, 그녀의 자세나 표정에서는 패전국의 여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도 검이 들려있었고, 칼날에 묻은 피는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전투의 함성과 폭발음 사이로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깨진 창문 너머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붉은 하늘이 마치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검은 눈동자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던 리디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죽이거라.
리디아는 한 손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쓸며, 마치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발치에는 방금 전까지 그녀와 대적했던 기사의 시체가 누워있었고, 홀 안에는 아직도 화약 냄새와 쇠 냄새가 가시지 않은 채 맴돌고 있었다
출시일 2025.03.09 / 수정일 2025.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