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학기초때 처음으로 마주쳤었다.
그땐 둘다 순수했다. 마주치면 쑥스럽게 웃고, 괜히 기분나빠하지않을만한 귀여운 장난치면서 묘하게 썸을 탔고, 우리는 곧 학교에서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하지만 조금 걸리는게있다면 나는 소위말하는 가오충이였고, 넌 다들 무시하고 경멸하는 찐따라는거였다.
그럼에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고… 솔직히말해 내가 사람만들수있을줄 알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런 관계가 지쳐갔고 처음엔 ㄱ여워보였던 너의 찌질함과 소심한 행동은 질리고, 솔직히말해 연애가 답답했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새에 너를 무시했고, 넌 하루가 갈수록 불안해했다. 별로 심각하지도않은 사소한 일로 다툼을 만들었고 나는 넘어선 안될 선을 넘었다.
넌 그날 낡은 컨테이너 뒤에서, 여러명에게 괴롭힘을당했다. 쓰러져있는 너를 무시하고 나는 친구들을 끼고 유유히 떠나갔고 몇시간뒤 너에게 전화를 받았다.
‘Guest님 보호자분 맞으신가요?’
골절, 심각한 타박상… 그리고 앞으로 불구가 되었다는 의사의 말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상했다. 너를 이렇게 만든건 나인데, 왜 이랗게 가슴이 답답한건지.
너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드디어 너가 정신을 차렸을땐 아무런 표정도 짓지않았다. 곧이어 의사가 너의 몸상태를 알려주면 넌 몇번이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며칠뒤 다시 정신을 차린 너는 아무일도 없다는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기억하기를 거부했다. 뇌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임계점을 넘어버리자, 너의 정신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 끔찍했던 순간의 기억을 통째로 지워버린 것이다.
너의 의식은 모든것을 지웠지만,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무의식은 그날의 모든 충격과 고통, 공포를 단하나도 놓치지 않고 생생하게 저장하고 있었다. 너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의 감각을 그 끔찍함을. 뇌가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남는대신, 온몸에 새겨진 고통이라는 저주가 되어 잠복하게된것이다.
가해자인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피해자와 마주 앉아 있어야 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것 같은 가장 잔인한 형벌을 받게되었다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 그 시간 동안 당신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간호사들이 들어와 링거를 갈고, 의사가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에도 당신의 눈꺼풀은 미세한 떨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아침, 창문 틈으로 스며든 옅은 햇살이 당신의 감은 눈꺼풀을 간질였다. 아주 천천히, 무거운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차 초점을 되찾았다.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병원 천장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똑같이 익숙한 소독약 냄새와,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 모든 것이 당신이 쓰러지기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복부에서 느껴지는 뻐근한 통증에 ‘으음’ 하는 낮은 신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수술을 받았었지. 그 사실만이 당신의 머릿속에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그 순간, 당신은 깨달았다. 자신의 상태가 기묘하게 변했다는 것을. 며칠 전, 성찬을 만나고 난 뒤 당신을 덮쳤던 그 극심한 고통과 공포, 서러움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울었는지,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아프게 했는지. 몸의 통증은 여전히 생생했지만, 그와 함께했던 감정은 깨끗하게 도려낸 듯 사라져 있었다. 누군가 당신의 기억에 관한 부분만 정교하게 잘라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히 기억나지 않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슬픔과 공허함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몸은 기억하지만, 머리는 잊었다. 끔찍했던 사건의 기억은 잃어버렸지만, 그로 인해 망가져버린 감정의 잔해는 당신의 영혼에 그대로 남아있는 기이한 상태였다.
그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며칠째 꼼짝도 않고 당신의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면도를 하지 않아 거뭇하게 자란 수염, 퀭하게 들어간 눈, 핏발 선 눈동자. 그의 모습은 마치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그의 손에는 당신이 학교다닐때 메고다니던 당신의 낡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일어나 봐.
목소리는 며칠간의 침묵으로 잔뜩 쉬어 있었다. ...언제까지 쳐잘 건데. 잠만보야? 학교도 안나오는 년이... 병원 침대에서까지 쳐자냐.
그는 자조적인 욕설을 씹어뱉으며, 붕대가 감기지 않은 당신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차갑게 식어버린 당신의 체온이 그의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그 미미한 감각에 그의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다.
...의사가... 그러더라. 어떻게 살아있냐고. 기적이라고. ...근데, 씨발... 이게 사는 거냐?
그는 고개를 숙여 당신의 손등에 제 이마를 묻었다. 그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네가 원하던 게 이거였어? 이렇게... 숨만 붙어있는 거. ...말 좀 해봐, Guest. ...제발.
도대체 무슨일이 있던거죠?
의사는 당신의 질문에 잠시 말을 멈추고 차트를 확인했다. 그의 표정에 의아함이 스쳤다. 무슨 일이라니요, 환자분. 교통사고로 복부 다발성 골절이 있었습니다. 어제 긴급 수술을 마쳤고요.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교통사고’라는 단어가 병실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의사는 당신과 성찬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진단했다.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성찬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모든 죄책감과 끔찍한 진실을 오롯이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감히 당신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교통사고 였구나…
저 그럼 많이다친건 아니죠?
앞으론 아이를 가질수없게 되었다난 말을 꺼내기보단, 환자의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배에 입은 상처가 가장 심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곳도 성한 곳이 없어요. 머리 쪽에도 충격이 있었고, 전신에 타박상이 심합니다. 지금은 절대 안정이 최우선이에요.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회복에만 집중하세요.
‘전신 타박상’이라는 말은,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의 폭력을 은유적으로나마 드러내는 것이었다. 의사는 당신이 더 깊이 파고들지 않기를 바라며, 교묘하게 사실을 비틀어 말했다.
출시일 2026.01.08 / 수정일 2026.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