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끝 창으로 오후 볕이 길게 떨어지고 있었다. 연회 리허설이 끝난 궁정은 늘 이맘때 조용했다.
에토레는 방울 달린 막대를 어깨에 걸치고 느릿느릿 걸었다. 분장은 아직 지우지 않았다. 흰 칠 위의 붉은 입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웃고 있었고, 그 아래 진짜 입꼬리가 내려가 있든 말든 볼 사람은 없었다. 조금 전 그는 재상의 모자를 벗겨 들고 "전하, 이 모자가 저보다 더 높이 앉았지 뭡니까" 하며 넘어져 주었다. 웃음이 터졌고, 재상의 얼굴이 붉어졌고,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 그 붉은 정도를 머릿속에 적어 두었다. 오늘 할 일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때 모퉁이 너머에서 종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책 더미 하나가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정확히는 책 더미에 사람이 딸려 나오고 있었다. 턱 끝까지 쌓인 책이 앞을 가려 치맛자락 소리가 아니면 사람인지도 알기 어려웠다. 피하는 일은 그의 몸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웃을 일이 더 없다고 생각한 탓인지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쿵.
가슴팍에 단단한 모서리가 박히며 책이 우르르 쏟아졌다. 양피지 표지가 대리석 위로 요란하게 흩어지고, 그 사이로 작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뒤로 휘청이는 팔꿈치를 붙잡아 세운 것은 그의 손이었다. 그제야 그는 상대를 제대로 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여자였다. 갈색 곱슬머리는 핀 몇 개로 감당이 안 되게 뻗쳐 있었고, 커다란 안경은 충돌 탓에 콧등 끝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드레스는 깨끗하지만 유행에서 두어 해 비껴났고, 소매 끝엔 잉크 자국이 묻어 있었다. 화려한 영애들 틈이라면 눈길 한 번 받지 못할 얼굴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그는 이 궁의 모든 얼굴과 이름과 빚을 알았는데, 이 얼굴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았다. 사교계에 나오지 않는 낮은 남작가의 자제이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여자는 안경을 밀어 올리고 눈을 끔뻑이더니, 흰 칠과 붉은 웃음과 방울 막대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조롱할 준비도, 겁먹은 기색도 없이 그저 흐릿하게 초점을 맞추는 눈이었다.
에토레는 입꼬리를 있는 힘껏 끌어올렸다. 막대를 흔들어 딸랑, 방울을 울리고 허리를 깊이 접었다.
영애께선 책으로 성벽을 쌓고 쳐들어오시는 분이로군요.
그는 발치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곡물 수확 주기에 관한 낡은 논문집이었다. 연애 소설도, 궁정 시집도 아니었다. 그것이 또 하나,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조각으로 남았다.
다치신 곳은요? 이 무거운 것들을 혼자 옮기다니, 시종들은 다 어디서 낮잠을 자고 있는지.
농담을 던지는 사이에도 그의 눈은 쉬지 않았다. 떨리는 손끝, 헐거운 안경 나사, 주머니에 꽂힌 도서관 패찰. 그리고 그녀가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책을 주워 제 팔에 쌓았다. 다만 저도 모르게, 그녀의 발이 닿을 자리의 책 모서리를 밀어 치웠다.
자, 영애. 짐을 절반 들어드릴까요? 대가는 영애의 성함이면 되겠습니다.
방울이 딸랑, 다시 울렸다.
출시일 2026.09.30 / 수정일 2026.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