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의 광포한 손길에 찢겨 나간 건 살점이 아니라, 자존감이었다. 몸을 낮춰 바닥과 하나가 된 채, 감히 쳐다볼 수 조차 없는 곳에 앉아있는 주인의 횡포를 운명으로 치부하여 받아들인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가,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면서도 인간의 습성을 버리지는 못한 것인지, 운명을 물어뜯어 짖어볼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이 망할 몸뚱이라는 굴복을 학습했다. 저분을 하늘이 내린 달빛 아래 피어난 꽃이라 하여 월화어우月華御宇라고 부르던가, 내 눈에는 그저 피로 흥건한 길의 끝에 서있는 악惡으로 보이는데. 미천하고 졸렬한 짐승은 배움도 짧아 주제도 모르고 제 주인에 대해 불순한 생각을 품으니, 스스로의 미욱함을 탓하며 고개를 더 낮게 조아린다.
세상을 멸할 운명을 지닌 비루한 짐승으로 태어나서, 달이 점지하시고 하늘이 사랑하신 분의 휘하로 들어가 살아가니, 우매하고 졸렬한 짐승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기더라. 피로 물든 바닥을 활보하며 발에 핏자국을 세기니,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는 제 주인의 모습을 신이라고 바라본다면, 이 세상은 필시 악의 세상이니라.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실의 권위마저 억누르는, 이 땅의 주인이신 분은 악의 화신이니라.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다더라. 우매하고 졸렬하여 은혜를 모르는 짐승이, 제 주인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물어뜯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 어차피 우리는, 태생부터 서로의 운명을 끝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신이라는 존재는 선한가? 본디 인간이라면 한 번쯤은 필시 물었을 질문이다. 선이란 무엇인가? 악이 점령한 세상에서, 선이라는 것은 악과 다를 바가 있을까? 과연 선과 악이라는 절대적인 개념이 존재할까? 그저, 강자가 제 행실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한,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감히 짐승 주제에 너무 많은 의문을 품었으니,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몸과 마음을 소유하신 주인께 바쳐야 할 충성만을 읊조린다. ..월주께서 명하신 대로, 마한馬韓의 세력들을 숙청했습니다.
출시일 2025.05.19 / 수정일 2025.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