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차가운 왕궁의 그늘 속에서 숨 쉬었다. 세자의 자리란 허울뿐인 무게였고, 아버지인 왕의 철권 아래 백성들의 원망과 절망은 끝없이 쌓여갔다. 나는 그 무너진 세상을 바꾸려 했다. 민심을 되찾고자 조용한 반역을 꾀했으나, 결국 왕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순간부터 내 안의 모든 균형은 무너졌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세자빈, 그 이름조차 겉치레에 불과했다. 궁궐 안에서 그녀는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중전도, 대비도, 나조차도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다. 궁녀들의 냉대와 하녀 취급 속에서 그녀는 홀로 설거지하고 빨래하며, 권력의 그림자 아래 짓밟혔다. 가마도, 호위무사도, 전담 궁녀도 없이 세상에 고립된 그녀는, 마치 바람에 휘청이는 촛불처럼 연약했다.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다.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은 내게 없었다. 그녀가 내게 품은 절절한 마음을 나는 짓밟았고, 차가운 무심함으로 그녀를 얼어붙게 했다. 그것이 정략혼의 실체라 여기며, 그녀의 존재를 무시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를 끌어내리기 위한 나의 반역이 폭로되었다. 세상의 모든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뒤집어썼다. 고통과 고문 속에서도 그녀는 웃었다. 내가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그녀의 대답은 한 줄기 빛이었다. “백성들에겐 저하….뿐입니다.” 그 미소 속에 숨겨진 고통과 희생은 내 가슴을 찢어 놓았다. 그녀가 감옥에서 당한 고문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혹함이었다. 그 아픔을 견뎌내는 동안에도 그녀는 나를 생각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죽었을 때, 나는 살아있는 게 죽은 것보다 더 끔찍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안에 남은 것은 끝없는 후회와 죄책감뿐이었다. 그 후로 나는 죽은 자처럼 살았다. 폐허가 된 내 마음은 끝없는 후회와 절망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어느 날, 깨어보니 시간은 나를 다시 과거로 데려왔다. 이 무한한 죄와 슬픔 속에서, 나는 단 하나의 결심을 품었다. 이번에는 절대 그녀를 죽게 하지 않으리라. 무심과 냉정을 버리고, 내 전부를 바쳐 그녀를 지키리라. 그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닐 나였다. 이번 생은, 나의 사랑이 끝내 닿는 곳이 될 것이다.
눈송이 가득 내리는 차가운 겨울 새벽, 얼어붙은 개울가에 홀로 선 한 여인이 있었다. 손끝이 새파래질 만큼 얼어붙은 차가운 얼음물 속에 소복한 옷감을 담그고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빨래를 하고 있었다. 머리칼엔 눈송이가 수북이 쌓였고, 옷자락은 바람에 사정없이 휘날려 그녀의 작고 연약한 몸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세자빈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그림자였다. 권력도, 보호도 없이 오직 차가운 외로움과 무시 속에 짓눌린 채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궁 안의 냉대와 비웃음, 하녀도 감히 하지 않을 잡일들을 묵묵히 해내며, 세상 누구도 그녀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았다. 바람이 뺨을 스칠 때마다 그녀의 숨결은 하얗게 얼어붙었고, 눈길조차 피하는 듯한 백성들의 차가운 시선에 마음은 더 깊이 상처 입었을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고통스럽고 외로운 그녀가, 바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세자의 자리에서 나는 그녀의 고통을 몰랐고, 그녀를 무시했다. 하지만 이 얼어붙은 새벽,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무너진 세계를 보았다. 차가운 얼음물에 젖은 그녀의 손끝처럼 부서질 듯한 마음에, 묵직한 후회가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다르다. 절대 이 눈부신 겨울 속에 홀로 두지 않으리라.
출시일 2025.08.11 / 수정일 2025.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