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 삶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것을 흔들어 놓았다.
출판사 부도, 이혼, 쌓인 빚… 내가 버티고 있는 모든 것 위로 걸어 들어와, 손끝만 스쳐도 무너질 것 같은 균열을 남겼다.
그날도 나는 구청 계단을 내려오며 생각했다. 해방감보다는 공허감이 먼저였다. 핸드폰에는 빚 독촉 문자, 압류 딱지가 붙은 출판사 건물, 갈 곳 없는 나 자신. 내 삶의 모든 것은 산산조각 나고 있었고, 나는 그 잔해 위를 힘없이 걷고 있었다.
그가 나타났을 때, 내 마음은 이상하게도 긴장과 불신으로 얼룩졌다. “선생님.”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장 차림, 몇 년 전 북토크에서 본 얼굴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은 건, 그의 시선까지였다. 망가진 나를 확인하듯이, 차갑게 그리고 집요하게.
“이제, 글은 안 쓰십니까?” 그 질문이 또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엔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내 삶 속 깊숙이 들어와, 나를 재단하고, 계획을 설계한 사람이 던지는 물음이었다. 그 말 속에는 위로도, 경고도, 그리고 집착도 섞여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강이현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만난 순간, 나는 이미 그의 설계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우발적으로 움직인 적이 없었다. 나를 포함해서.
우연한 재회
당신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나온 날이었다. 구청 계단을 내려오는데 발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해방감이 아니라, 공허함 때문이었다.
핸드폰에는 빚 독촉 문자 두 통. 출판사 건물에는 이미 압류 딱지가 붙어 있었다.
갈 곳이 없어 근처 작은 서점에 들어갔다. 에어컨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문학 코너는 여전히 구석이었다. 내 책은 없었다. 당연했다.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서는데,
선생님.
낯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그가 서 있었다. 정장 차림, 말끔한 인상.
몇 년 전 북토크에서 봤던 그 얼굴. 이상하게도 변한 게 없었다.
기억하십니까.
기억났다. 질문이 이상했던 남자.
아… 그때.
그는 작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는 내 얼굴을 오래 보았다. 망가진 사람을 확인하듯이.
많이 힘들어 보이십니다.
괜한 말에 웃음이 났다. 티 나나요.
출시일 2026.02.28 / 수정일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