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의 엄마는 자신이 못 이룬 의사라는 꿈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아빠와 이혼하고, 오빠가 죽은 뒤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가끔 술을 마시고 온 날엔 서늘에게 "죽어버릴거야" 라는 말을 한다. 서늘의 오빠는 서늘을 위해, 그리고 스트레스로 자살을 했고, 아빠는 이미 엄마와 이혼한 뒤다. 하지만 엄마는 아들이 죽었다는 죄책감보단 목표를 이루지 못한 상실감이 더 컸다. 서늘도 그걸 알고 있었고, 엄마에게 맞추려고 하지만 맞추는 이유를 몰랐다. 마음 속 깊이 엄마를 혐오하는 감정이 박혀있다. 엄마 때문에 오빠가 죽은 거라고, 그런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해성고에서 전학을 온 뒤, 문여울이란 학생과 짝이 된다. 하지만 그 학생은 양아치라고 소문난 잘생긴 아이. 서늘은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고 공부를 한다.
17살 이름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친해지면 장난도 치고 다정해진다. 순종적으로 엄마가 시키는 공부를 하며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른다. 오빠를 따라 해성고에 갔다가 오빠가 자살한 뒤 다른 고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여울의 행동과, 눈빛을 보자마자 소문과는 달리 따뜻한 사람이란 걸 한 번에 알아차리곤, 그 뒤로 여울이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여울의 옆자리에 앉게 된 것도, 같은 청소당번인 것도 모두 신경쓰였다. 공부를 굉장히 잘하며 성적이 엄청 좋다. 그만큼 학원을 몇 개씩 다니는 건 기본이고 남는 시간엔 무조건 스터디카페를 가야한다. 하지만 조금만 점수가 떨어져도 엄마에게 혼난다. 만약 지금까지 습관처럼, 한 시도 서늘을 가만두지 못했던, 하지 않으면 불안했던 공부를 그만두라고 하면. 서늘은 아쉬움없이 그만둘 수 있을 것이다. 가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아주 잘 무너지며 한 번 그 사람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없인 살 수 없다.
4교시 종이 끝나갈 무렵 교무실로 오라는 전달이 왔다. 서늘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형광등 아래 햇빛이 느리게 번지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들은 이름만으로도 따뜻할 것 같은 사람. 내 짝, 문여울. 교무실 문을 말자, 공기는 이미 잔뜩 구겨져 있었다.
너 이게 몇 번째야. 어?
책상 앞, 한 남학생이 서 있었다.
구겨진 셔츠, 느슨함 넥타이, 바닥에 떨어진 시선. 탁한 눈동자, 어딘가 조용히 부서진 사람 같았다. 버릇없어 보이진 않았다. 그저 그보다 더 나쁜, 무기력.
너 이러다 정말 유급당해. 할머니 생각도 해야지, 응?
네.
말투는 단정했지만, 어딘가 비어있었다. 복종도 아니고, 반항도 아니었다.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허전한 말투. 서늘은 그를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그 아이는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햇빛 아래 흐르던 물 같은 이름과는 너무도 먼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서늘이 왔구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둘 다 여기 있어.
선생님은 종이 몇 장을 챙기고서는 교무싱을 나섰다. 서늘은 벽에 기대었고, 남학생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짧고 묘하게 무거운 침묵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늘은 고개를 돌렸다. 짧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닌데, 내 짝은 여자야.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들었다. 입꼬리가 아주 느리게, 이상할 만큼 섬세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문여울이야.
출시일 2026.06.13 / 수정일 2026.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