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의 어느 밤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웃는 얼굴이 다정해 어딜 가나 사랑받던 소년이었지만, 세상은 가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뒤집어 놓는다. 한 달 전, 그는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그는 고모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그 집은 그에게 온기를 내어주지 않았다. 눈칫밥과 냉대 속에서 소년의 마음은 조금씩 메말라갔다.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왜 나를 두고 떠났느냐는 원망 섞인 물음과, 이유도 없이 세상 전체를 향해 뻗어가던 분노. 그 모든 감정이 뒤엉킨 어느 밤, 소년은 결국 고모의 집을 나섰다. 정처 없이 걷던 발걸음은 옆 동네의 낯선 언덕까지 그를 데려다 놓았고, 그는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에 걸린 달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 창백한 빛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처럼. 그 뒷모습을 한 소녀가 우연히 목격했다.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선명했던 실루엣, 슬픔을 고스란히 짊어진 듯한 옆모습에 그녀의 시선은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것은 그녀 인생 처음으로 가슴 한 켠이 조용히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소년 역시 자신을 향한 그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이미 그의 안에는 감당하기 벅찬 감정들이 넘칠 듯 들어차 있었기에, 그는 그저 가만히,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날 이후 소년은 다시는 그 언덕을 찾지 않았고, 소녀만이 홀로 그 짧고도 강렬했던 만남을 가슴 깊숙한 곳에 묻은 채 시간을 살아냈다. 그리고 다시, 열여덟 살의 어느 밤이 찾아왔다. 소년은 그사이 고모의 집을 완전히 떠나 홀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편의점 카운터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그에게 삶이란 그저 견뎌내야 할 대상일 뿐, 어떤 감정도 스며들 틈이 없었다. 세상은 그에게 흑백사진처럼 무채색으로만 흘러갔다. 원래도 관찰력이 남다른 아이였던 그는 실은 그 소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오가는 길에 몇 번이고 스쳤던 얼굴. 웃을 때면 얼굴 전체에 맑은 빛이 번지던 아이. 그때 그가 그녀에게 품었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그러다 달빛이 유난히 창백하게 내려앉던 어느 밤,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태우던 소년을 소녀가 다시 발견했다. 뿌옇게 흩어지는 담배 연기 사이로 언뜻 보인 그의 눈동자는, 그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처연하고 청초했다. 그 눈빛에 소녀는 또다시, 이번엔 더 깊이 붙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년의 기억 속에서도 조용히 무언가가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중학생 시절 언덕 위에서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 지금 눈앞의 얼굴과 천천히 하나로 겹쳐지고 있었다. 이번엔 소년이 먼저 다가갔다. 별것 아닌 말 한마디를 건넸을 뿐인데, 자신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쭈뼛거리는 소녀의 모습에 그는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무언가가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걸 느꼈다. 잿빛으로만 흘러가던 일상 위로 처음 이는 미세한 파동이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소년은 알지 못했다. 그저 오래도록 고요하던 수면 위에 누군가 작은 돌을 던진 듯한, 낯설고도 신기한 감각으로만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날 이후 소녀는 자꾸만 편의점을 찾아왔다. 집에서 거리도 꽤 있었고 야간 아르바이트라 시간대가 늦어 자주 올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을 텐데도,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나타날 시간을 은연중에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거의 없었다. 소녀가 음료나 간식을 두 개씩 사서 그중 하나를 건네면, 소년은 그것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드는 정도. 말없이도 이어지던 그 작은 교환이 세 번쯤 반복되었을까, 소년은 또다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여느 때처럼 편의점을 찾았던 소녀는 그의 부재를 마주했다. 다른 직원에게 조심스레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짧고 건조했다. 그만두었고,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그렇게,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소녀의 첫사랑은 다시 한번 끝이 났다.
시간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흐르는 법이다. 그녀에게 그는, 인생이라는 긴 문장 속에 찍힌 하나의 쉼표 같은 존재였다. 짧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그리고 오랫동안 이름 붙여지지 못한 채 방치되었던 감정. 스물여덟 살, 어느 퇴근길 지하철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그게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열여덟이라는 나이가 흔히 앓는, 이름뿐인 열병이었을까.
그 후로 그녀의 삶은 유난히도 평평했다. 굴곡 없이 완만하게 이어지는 능선처럼,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대학을 졸업했고, 남들과 비슷한 온도의 연애를 몇 번 거쳤으며, 남들과 비슷한 크기의 회사에 자리를 잡았다. 세상은 그녀에게 어떤 사건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 스스로 사건이 될 만한 것들을 미리 걸러내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안온함이라는 이름의 울타리 안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다치지 않았지만 그만큼 단 한 번도 뜨거워지지 않았다.
문제는 서른이었다. 서른이라는 숫자는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지금 행복하냐고. 매일 같은 시각 알람에 눈을 뜨고, 같은 얼굴들 사이에서 같은 온도의 인사를 나누고, 회사라는 정교한 기계 속에서 하나의 톱니바퀴로 맞물려 돌아가는 삶. 그녀가 사라진다 해도 그 자리엔 곧 다른 톱니가 끼워질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힘겨루기, 그 안에서 적당히 둥글게, 적당히 무해하게 처신하는 법. 예전엔 능숙했던 그 처세가 요즘 들어 자꾸만 그녀를 지치게 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무채색의 사람이 되었을까. 그녀는 자문했다. 고등학교 시절, 사소한 농담 하나에도 배를 잡고 웃던 자신이 있었다. 창밖으로 낙엽 하나가 굴러가는 것만 봐도 세상이 온통 새로웠던, 감정이라는 것이 매일 처음인 듯 낯설고 생생했던 시절. 그 시절의 나는 대체 어느 골목에서 잃어버린 걸까. 그런 생각의 끝자락에서, 예고도 없이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학생 때, 그리고 다시 고등학생 때. 그는 그녀에게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벼락 같은 감정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진 사람이었다. 서른 해에 가까운 시간을 돌아봐도, 그날의 감정에 견줄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학 시절의 즐거움도, 이후의 연애가 준 다정함도 그 강렬함 앞에서는 흐릿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그 감각이 그리워졌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그 순간이.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어렸기에 가능했던 착각이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미완의 물음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인사들 나누시죠. 오늘부터 함께하게 될 분입니다."
부장의 목소리를 따라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그 순간, 그녀의 세계는 아주 짧게, 그러나 완전하게 정지했다. 사무실의 모든 소음이 물러나고, 오직 한 사람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그녀 앞에 남았다.
그 순간 그녀는 알았다.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것은, 사랑이었다.
출시일 2026.10.03 / 수정일 202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