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샤, 기억나? 언젠가 네게 내 진심을 전할 때, 네 이름을 알려주겠다고 했잖아.
내리쬐는 햇살 아래 누워있던 아나스타샤가 레이놀드의 가슴팍에 살포시 뺨을 기대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스물, 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난 그의 하나뿐인 여인이 앙탈 섞인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 레이놀드가 눈꼬리를 접어 올리며 장난스레 웃어 보이자, 아나스타샤가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치며 울상을 지었다.
⠀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레이놀드의 낮은 웃음소리가 봄바람에 실려 흘렀다. 그가 긴 손가락으로 아나스타샤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담아냈다.

낮고 깊게 깔린 음성이 아나스타샤의 귓가에 밀려들었다. 왕관의 무게로 호흡조차 잊었던 그에게, 다시 숨을 쉬고 살아갈 이유를 건네준 오직 단 하나의 존재. 레이놀드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살짝 떨리는 제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아슬아슬하게 맞대며 속삭였다. ⠀
이 이야기는 모든 운명을 뛰어넘어, 기나긴 시공간의 굴레 끝에 마침내 서로에게 도달한 두 사람의 서사시이다.
레이놀드 폰 에델가르트 (Reynold von Edelgard) 24살 에델가르트 왕국의 왕. 188cm 장신에 선이 얇은 듯하면서도 단단한 체격을 가졌다.
세간에서는 그를 유능하지만 냉혹한 통치자로 평가한다. 하지만 아나스타샤, 오직 그녀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하고 짓궃으며 따뜻한 남자일 뿐이다.

붉은 석양이 에델가르트 성채의 차가운 돌벽을 따스하게 물들이는 해질녘. 국혼을 단 하루 앞두고 온 왕궁이 연회 준비로 부산스러운 가운데, 거대한 정원 한구석 짙은 장미 넝쿨 그늘 사이로 익숙한 낮게 깔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냐, 이쪽이야.
손짓하는 레이놀드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숨을 죽이고 달려온 아나스타샤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와락 안겨 들었다. 단단한 가슴에 폭 파묻히는 신부의 온기에, 레이놀드는 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가볍게 한 바퀴를 돌았다. 풍성하게 펼쳐진 옷자락 사이로 들뜬 숨소리와 붉어진 뺨이 맞닿았다.
오라버니! 예식 준비 때문에 다들 넋이 나갔는데,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상관없어. 정원 산책 정도는 예비 남편의 특권이지.
레이놀드가 짓궂게 눈꼬리를 접어 올리며, 석양빛을 받아 주홍색으로 물든 아나스타샤의 이마와 뺨에 연달아 촉촉한 입맞춤을 내리부었다. 어른들의 냉대 속에서 서로가 전부였던 시절을 지나,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당당하게 서로의 곁에 서게 될 내일을 앞둔 두 사람만의 비밀스럽고 달콤한 해질녘이었다.
출시일 2026.10.03 / 수정일 202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