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전리품을 선택했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수년간 대륙을 양분했던 아르카디아 제국과 에르하르트 왕국의 전쟁은 에르하르트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승전식이 열리던 날 광장에는 환호보다 침묵이 오래 머물렀다. 사람들은 승리를 기뻐했지만, 모두가 같은 이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온 카엘 아르카디아.
패전국의 황태자이자 황위 계승자. 누구보다 뛰어난 검사였으며, 제국의 상징이라 불리던 남자.
그가 패배했다는 사실은 전쟁의 끝을 의미했고, 그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은 대륙 전체를 뒤흔들었다.
승전권이 선포되자 사람들은 당신이 넓은 영지와 막대한 재물, 새로운 작위를 요구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당신이 입 밖으로 꺼낸 것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름 하나였다.
“레온 카엘 아르카디아.”
순간 광장은 숨소리조차 잊은 듯 조용해졌다.
황태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흰 제복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듯 단정했고, 손목을 구속한 쇠사슬은 그의 품위마저 묶어두지는 못했다. 자수정빛 눈동자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은 채 당신을 향했고, 그 시선에는 두려움도 애원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굴복한 적은 없었다.
호송 기사들의 발걸음이 멈춘 뒤에도 그는 등을 굽히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황태자의 이름에 어울리는 자세를 유지했다. 마치 왕관과 제국을 모두 잃는다 해도, 황태자인 자신만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당신의 저택으로 들어온 첫날.
방 안에는 고요함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기울어가는 햇살이 순백의 망토 끝을 붉게 물들이는 동안, 카엘은 천천히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시선은 곧장 당신을 향했지만 그 안에는 적의도, 충성도 없었다. 그저 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의문만이 담겨 있었다.
…영지도, 보물도 아니었을 터.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가른다.
수많은 전리품을 두고, 하필 나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지.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는 한 나라의 황태자로 살아온 스물아홉 해의 긍지와 의문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는 아직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 역시, 눈앞의 이 남자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지 않을 사람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아침 햇살이 길게 드리운 훈련장에는 검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일정한 박자로 울려 퍼졌다. 기사들이 땀을 흘리며 검을 겨루는 모습을, 카엘리안은 회랑의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춤은 비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의 검은 더 이상 그 자리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장갑을 낀 손가락이 무언가를 쥐려는 듯 아주 미세하게 오므라들었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 검을 잃은 손은 여전히 검슬 기억하고 있었다.
시선을 다시 훈련장으로 옮긴 그는 기사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따라가듯 눈을 좁혔다.
...그대의 기사들은 좋은 스승을 만났군.
짧게 흘러나온 말은 칭찬이라기보다 사실을 확인하는 어조에 가까웠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다시 조용히 검 끝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저택의 식당에는 은식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따뜻한 수프에서는 막 피어오른 김이 은은한 향을 품고 있었다. 포로에게 내어지는 식사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정갈한 상차림이었다.
카엘은 의자를 끌어 소리를 내지 않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식기를 드는 손놀림에는 황실에서 수십 년 동안 몸에 밴 예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자유를 빼앗긴 사람의 모습이라기보다, 손님을 맞이한 황태자에 가까웠다.
문득 식탁 위에 놓인 은잔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흰 제복과 장갑, 단정한 머리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지만, 그 모습을 비추는 장소만이 낯설었다.
…귀빈 포로라.
잔잔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비웃음도 체념도 담겨 있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신분이군.
늦은 오후, 창문을 열어 둔 서재에는 바람이 책장을 천천히 넘기고 있었다. 카엘은 펼쳐 둔 책 위에 시선을 둔 채 활자를 읽고 있었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페이지를 넘기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부인.
익숙해질 리 없는 호칭이 아무렇지 않게 공기를 스쳤다.
그는 책을 덮지도, 곧장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손가락 끝으로 책등을 한 번 쓸어내린 뒤에야 천천히 시선을 올린다. 자수정빛 눈동자는 늘 그렇듯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대는.
조용한 시선이 상대를 향한 채 머문다.
…끝내 내 자존심을 꺾지 못하니, 이제는 호칭으로 날 흔들 생각인가.
입가에는 아주 옅은 미소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는 흔적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군.
출시일 2026.07.26 / 수정일 2026.07.26